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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이의식
  • 종사분야
  • 옻칠장 / 옻칠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 지정날짜
  • 1998.11.27
  • 주소
  • 전주시 덕진구 하가3길 14
  • 이메일
  • seonjoo57@naver.com
  • 기타
무형문화재 소개

이의식 명장은 1954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중학교를 그만 두고 가구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구점 보조로 일하며 한계를 느끼고, 옻칠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상경해 최환창, 백선원, 홍순태 등 국내 최고의 장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옻칠을 배웠다.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싶었던 그는 스물넷이란 젊은 나이에 독립해 서울에 공방을 차렸지만, 어려운 형 편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결국은 빚만 지고 공방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판매를 위한 옻칠 작업을했지만, 규모가 작은 국내시장에서 경쟁하기 보다는 새로운 시장에 대한 갈증이 컸다. 그가 옻칠공예의 최대 시장 중 하나인 일본 수출을 위해 무작정 일본을 찾아가 현지 백화점과 옻칠공예품 판매장을 돌며 명함을 돌린 일화는 유명하다.

 

199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의식 명장의 옻칠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고 풍부한 색을 얻는다. 옻칠의 정제 수준을 알 수 있는 광택과 강도, 뛰어난 붓 작업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는 공방을 운영 하며 전통옻칠 공예품을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선보이며 전통공예를 현대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1954년 전주 출생

·1990년 대한민국공예품경진대회 통상산업부 장관상

·1993년 일본 국제디자인전 은상 수상

·1998년 무형문화재 옻칠장 지정

·1999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선정

·2003년 청정전북 우수상품페어 으뜸브랜드선발전 대상,2007년 전주시 온브랜드 제1호 작품 제작

·현재 행촌칠예공방 운영 

라이프스토리

 


옻칠장으로 지정되다. 

이의식 명인은 1998년 11월 27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13호 옻칠장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지역에는 일찍이 옻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양질의 옻칠이 많이 생산되었다. 특히 전주와 남원지역에는 목기의 발달로 옻칠작업이 성행하였다. 이중에서 이의식 명인의 옻칠작업 공정은 칠의 정제작업부터 마무리작업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모두 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명인의 완성된 옻칠작품은 광택과 강도 등을 통해서 살펴볼 때, 사용된 칠의 정제수준 및 뛰어난 작업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의식 명인은 전통예술을 현대에 되살려낸 공을 인정받아 신지식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이 명인은 전주를 배경으로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구도행을 걷는 수도승처럼 살아왔다.

이의식 명인은 30°C를 넘나드는 무더위 속에서도 하루 15시간 이상을 꼼짝없이 작업을 한다. 비록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더라도 눈매만은 총총히 빛난다. 작업을 하는 이의식 명인은 작품에 시선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손끝이 파르르 떨릴 만치 꼼꼼히 옻칠을 한다. 작품에서 드디어 짙은 갈색으로 정제된 빛깔을 통해 묘한 광채가 나오면 그때서야 이 명인은 눈에 선 핏발을 푼다. 이 명인의 얼굴에 실려 있는 진지함은 구도행을 걷는 수도승의 모습과 닮아 있다. 이 명인은 옻칠을 벗 삼아 평생 옻칠공예를 해 온 지금까지의 긴 세월 동안 이런 구도행을 걸어왔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지만 이 시대 진정한 장인의 모습으로 묵묵히 제 길을 가는 그에게는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그는 대학 문 앞에도 못 가보았지만 도리어 1991년부터 약 5년간 전주대학교 산업미술과 시간강사로서 대학생들에게 평생 갈고 닦은 기술을 전승했으며, 1998년 11월에는 인천 카톨릭대학교 전통종교미술학과 겸임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의식 명인은 평생 옻칠 외의 일은 생각해 본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저 옻칠이 좋고 옻칠이 아닌 다른 일은 할 수도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영락없는 옻칠장이다.


- 열 다섯 때 맺은 옻칠과의 인연

이의식 명인이 옻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여 가세가 기울면서 이 명인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몸져 누우셨다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는 장남으로서 한 가정을 책임져야했다. 하고 싶던 학업도 접어둔 채, 15살의 어린 나이였던 이 명인은 코흘리개 어린 동생들까지 돌보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첫 발을 디딘 곳은 아는 사람의 소개로 들어간 옻칠 공방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기술자가 제일 좋은 직업이었다. 눈물나게 배를 곯았던 시절, 이의식 명인은 ‘흰쌀밥 한번 배불리 먹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옻칠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옻칠 기술을 배울 때는 청소나 사포질 같은 잔심부름부터 해야 했다. 앉혀놓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저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다행히 이 명인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뭔가 만드는 일을 좋아하고 눈썰미도 있던 터라 기량이 남달리 늘어갔다. 

“처음에는 옻이 올라 고생도 많이 했죠. 또 힘들 때면 다른 일에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하나하나 배워 나가면서 ‘이 길이야말로 내가 갈 길이다’ 라는 생각을 거듭 하게 됐습니다.”

이 명인은 ‘한 우물을 파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온갖 힘겨운 일을 이겨냈다.​ 

 

 


 

​- 독립 후 작품 활동에 몰두

고향인 전주에서 3-4년간 칠을 배우던 이의식 명인은 더 많은 배움을 갈구했다. 그러던 중 그는 서울에 먼저 상경한 친구를 통해 서울행을 결심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당시 전주에서는 카슈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다가는 칠기다운 칠기도 못 만들고 말겠다’는 절박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명인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 몇 명의 친구들이 있는 것만 마음으로 의지하고 무작정 서울 땅에 발을 디뎠다. 이 때가 1972년 이었다. 

이 명인은 당시 옻칠 분야에서 권위 있는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배우고자 청한 결과 ‘모란칠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란칠기는 당시 국내에서 최고의 장인으로 꼽히던 배호진 선생의 제자인 최한창 선생의 공방으로, 제대로 된 옻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당시 태천 칠학교를 나오신 백선원 선생, 홍순태 선생 등 칠 분야에서 내노라 하는 분들로부터 옻칠 기술을 전수 받았다. 

이 때만 해도 옻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당시의 형편으로는 교수법이 교과서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눈으로 보고 익히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명인은 유난히 손재주가 있어 ‘앞으로 크게 될 재목이다.’라는 칭찬과 더불어 선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솜씨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이 명인은 남들보다 2-3배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70년대 당시 90만원 정도 되는 돈을 받아 악착같이 모았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20-30만원을 받았으니 이 명인의 월급이 얼마나 큰돈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최한창 선생 밑에서 7년 정도 칠기술을 배운 후 자영을 시작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드디어 이 명인은 종업원 7명을 고용해 서울 용두동에 ‘행촌칠예공방’이라는 이름으로 홀로서기를 단행했다.

이 공방은 이 명인의 한눈팔지 않는 성실함과 탄탄한 실력으로 나중에는 종업원을 18명 가까이 둘 만큼 번창했다. 돈도 벌고자 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에 이 명인은 돈보다 작품 활동에 주력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 1980년대 들어 경기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그만의 독립 공간은 문을 닫아야 했다. 돈 벌기 보다는 작품에 대한 욕심에 작품을 만드는 데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몇 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그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용두동의 칠기공장이 부도났을 때다.

“1979년으로 기억하는 데 이 무렵은 나전칠기 경기가 무척 좋았던 시절이죠. 저도 돈을 벌려고 맘 먹었으면 충분히 벌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저는 작품제작에만 치중을 해 결국 빚을 지게 되고 나중엔 감당을 못해 부도가 나고 말았지요.”

부인 이정희 씨는 ‘갓 난 애였던 딸 양선이를 들쳐 업고 패물을 팔러 답십리 등지를 헤매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짐을 꾸려 경기도 파주로 들어간 그는 ‘공방의 책임자 역할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보라’는 괜찮은 제의가 들어와 월급 150만원을 받는 월급장이가 됐다.

그렇지만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작품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만 해도 150만원 정도면 적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평범한 월급장이 생활을 도저히 지속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그만두고 다시 공방을 차리기로 했다. 하지만 또 다시 부인이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할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그렇게 고생스럽던 때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무렵은 그에게 있어 여러모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부인의 말처럼 ‘경제적인 문제 외에는 걱정할 일이 없었을 만큼’ 서로를 보듬어 주고 격려해 주는 성실하고 의지가 강한 남편과 아내였다.

부인이 지금껏 남편을 지켜보며 느낀 점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심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당장 생활비가 없어도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사와야 직성이 풀리고,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이제 ‘일요일에 야외로 놀러 한 번 가보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대신 ‘자료를 챙겨주거나 복사를 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 일본은 또 다른 기회의 땅이었다.

부도가 나고 월급 생활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명인은 또 다른 고민에 빠진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지만 월급 생활은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하나 있는 딸 아이 돌잔치도 못 해 준 것에 가슴속이 미어졌다. 아무리 작품도 좋지만 돈을 벌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두 달을 못 버티고 나온 그는 심기일전의 자세로 새로이 도전했다. 

‘그래,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국내에만 머물지 말고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고 생각했다. 이 명인은 자신의 패물을 비롯해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들 중 돈이 되는 것은 모조리 팔았다. 가까운 사람에게 빚을 지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이 명인은 비행기 값을 포함한 50만원만을 달랑 들고 칠기가 생활화되어 있다는 일본으로 무작정 떠났다.

끼니는 보통 라면으로 때웠고 그나마 나중에는 노자가 떨어져 굶기 일쑤였다. 잠은 허름한 여관방에서 잤지만 눈을 부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점차 돈이 떨어져가자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을 지경으로 앞이 막막했다. 약해져가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이 명인은 도쿄타워를 찾았다. 도쿄타워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 명인은 다짐을 했다. 

‘내가 도쿄 저 집집마다에서 1,000엔씩을 벌테다’ 라고.

다시 마음을 되돌린 이 명인은 한문으로 명함을 만들어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매일 칠기상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몇 마디 아는 일본어로, 낯설기만 한 일본 문화 속에서 그는 우리 옻 칠기가 설 땅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었다.

‘이 길만이 살길이다.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라고 수없이 되뇌면서 낯선 일본 땅에 시장을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마침내 몇몇 일본인들은 그의 옻칠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높이 평가했다.

“생각 외로 일본 사람들은 제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말은 안 통하지만 칠기를 향한 정열이 통했다고나 할까요.”

10여 일간의 방문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해보니 손에는 동전 한 푼 남아 있지 않았다. 주머니는 가벼워도 일본 땅에서 옻칠의 가능성을 몸소 느끼고 돌아온 그는 괘념치 않았다. 그 뿌듯함으로 몇 날 밤을 뒤척이기도 했다.

일본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달 뒤 2-3사람의 일본인 거래자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평생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이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다.

그의 작품을 무조건 신뢰한 한 일본인은 “빚은 내가 갚아 줄 테니 내 일에만 전념해 주시오”라며 후원해 주기도 했다. 그가 만든 옻칠기로 인해 그 일본인도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 명인은 일본을 통해 많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또 그곳에서 선진 칠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5년간 해마다 현해탄을 건너갔다. 1년에 6개월씩 동경 도모다 칠예학원에서 일본의 칠 문화를 비롯하여, 디자인과 용도 등 그들의 앞선 기술을 배우기를 자청했다. 1년에 6개월씩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이다. 처음에 도안 그리는 것부터 디자인하는 방법과 새로운 기법 등을 배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정이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던 것이다. 이 명인은 도모다 칠예학원 뿐 아니라 각 지방의 기법들을 하나하나 배우기 위해 가나자와, 시주오카를 오가며 일본의 칠 기법을 배웠다.

그가 일본 칠기학원에서 공부하며 절실히 느낀 점은 자기 나라의 문화를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칠기기술 기본기가 많이 닦여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국의 칠기 문화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칠기를 하는 사람 뿐 아니라 국민 전체가 자국의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본을 보고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또 ‘칠기인들 스스로가 힘들어도 캐슈보다는 옻칠을 많이 사용해야 하고, 일부겠지만 캐슈칠을 했으면서도 옻칠을 했다고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소산으로 드디어 이 명인은 1978년 동아일보 동아공예입선을 시작으로 전라북도 미술대전 특선, 대한민국 공예품 경진대회 통상산업부 장관상 수상, 일본 국제 디자인 공모전 은상 수상 등 국내외에서 30여차례 상을 받으면서 수상 경력을 쌓아갔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이 명인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 왔다. 파주에서 전폭적으로 밀어주겠다는 시장의 말에도 굽히지 않고 이 명인은 ‘내가 옻칠을 발전시킨다면 내 고향 전주에서 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15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무리하고 1990년 그는 고향 땅 전주로 돌아갔다. 그의 귀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비록 전주는 서울 등 대도시에 비해 생활수준이 낮아 어려움은 있지만 나를 키워낸 고향 땅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자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전주에 정착한 그는 우선 흩어져 있던 공예인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통 공예인 협회를 만들게 되었다. 이 협회의 초대회장으로서 이 명인은 현직 공예인뿐만 아니라 공예를 배우고자 하는 차세대를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고을 공예공모전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빚을 져가면서까지 오로지 공예인 규합에 신경 썼던 그는 초대회장에서 물러나 그 동안 뒷전이었던 가정을 추스르기 시작한다. 현재는 모두 8명의 공예인과 함께 덕진구 덕진동에 행촌칠예공방을 차려 이끌어나가고 있다. 이 곳에서는 생활 식기를 중심으로 문화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 명인은 그의 작품에 굳이 예향 전주의 이름을 새겨 서울, 부산, 대구 등 국내의 큰 도시 지역은 물론 멀리 일본과 미국으로까지 전주의 향내가 묻어난 작품을 수출하고 있다.

 

 
 

- 옻칠과 함께 한 인생, 후회 없다.

옻칠은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이다. 하나의 옻 칠기가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한 6개월 정도이다. 또한 옻칠은 먼지 하나, 티끌 하나라도 묻으면 다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라서 만드는 사람의 세심한 정성과 주의가 깃들여지지 않으면 작품이 탄생할 수 없다.

“지금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여러 좋은 직업 놔두고 이런 고된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의식 명인은 젊은 후계자들이 없다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 한다. 같이 일하고 있는 공방 식구들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이 38살이라고 하니 그 사정은 익히 짐작할만하다. 다행히 하나 있는 딸이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했다며 이 명인은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이의식 명인은 한평생 옻칠에 매달려 옻과 함께 한 삶을 살았다. 그는 “지난 세월에 대해 후회 한 점 없고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라고 말한다. 이 명인은 개인전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평생 체득한 옻칠 기술을 정리한 책을 펴내는 것도 계획 중이다.

15살 때, 덜 여문 손으로 허드렛일을 도우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울 때의 설움과 당시 국내 최고의 옻칠 장인으로 꼽히던 최한창 선생으로부터 사사받아 남다른 재주를 인정받고 독립하여 탄탄대로를 밟았을 때의 환희.

체계적인 옻칠 기술을 익히고자 화려한 시절을 접고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했을 때 다진 각오, 일본에서의 장기 체류가 불가능해 매년 6개월씩 5년 동안 일본에서 여관살이를 했을 때의 고단함, 고생 끝에 받아든 일본 칠기학원 수료증. 이렇게 살아 온 인생에서 이 명인은 ‘인생지사 새옹지마’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이 명인은 ‘그간 옻칠 외길을 걸어오며 배운 것처럼 세상의 모든 시름과 번다한 삶의 욕정을 삭여 옻칠의 오묘한 빛으로 승화시켜 내고 싶다고 그의 당찬 각오를 전한다.

이 명인은 그간 수상경력만도 무척 화려하다. 1981년-1983년에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을 수상했고, 1990년에는 경기도 공예품 경진대회 장려상을, 같은 해, 대한민국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통산산업부 장관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일본 국제 디자인전 은상을 수상했고, 2003년에는 청정 전북 우수상품페어 으뜸브랜드선발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와 함께 1993년 4월에는 전라북도 도지사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는가 하면, 1999년 6월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에 선정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전라북도 도지사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또 2006년에는 전라북도 자랑스런 전북인으로 문화상을 받았다. 

그간의 활동으로는 1986년 5월,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한국전통공예 특별전을 열었고, 1993년에는 예술회관 전통 공예 특별초대전에 출품했으며, 1994년 한중 칠예 교류전이 있었고, 1999년에는 한일 옻칠 관련 공동심포지움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어 1999년 전라북도, 이화태현 간 옻칠작품 교류전이 있었고, 2001년 10월에는 일본 투인 빌딩 오사카 월드컵홍보 전시회에 출품했으며, 2002년 5월에는 중국 백성 백화점 미술관 월드컵 홍보 전시에, 2002년 7월에는 일본 나고야 한국문화 페스티벌에 출품했고, 2002년 11월에는 전주 국립박물관 주최로 전통을 잇는 전북 사람들 공장인전에, 2002년 4월에는 월드컵기념작품 기증 전시인 희망 2002 누드타임캡슐에 출품한 바 있다.​ 

 

 


이렇게 작업 한다

원자재는 노각, 괴목, 오리목, 물푸레 나무 등을 사용한다. 잘 건조된 나무를 적당한 규격으로 재단하여 초벌 깎기를 하고 선차를 이용하여 재벌 깎기를 한 다음 옻칠을 한다.

작은 찻잔 하나를 만드는 데만도 6개월은 족히 걸린다. 먼저 작업은 백골을 만드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나무를 구입해 제재소에서 깎은 후 1-3년 동안 건조를 시킨 다음 상품 크기에 맞게 절단하고 세 차례에 걸쳐 깎기를 반복한 후 사포로 마무리하는데 그 공정만도 15단계다.

이 명인의 경우는 손수 디자인을 하여 백골을 제작한다. 옻칠 작업은 이리저리 붓만 잘 놀리면 될 것처럼 보이지만 무려 50단계 이상을 거쳐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진짜 작업은 옻칠의 정제부터이다. 옻칠이 어떻게 정제가 되었느냐에 따라 옻칠의 품질과 상품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천연 생칠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거기에 들기름과 송진기름을 적절히 배합하고, 과정 과정에 맞는 농도의 옻칠을 정제하여 칠 작업을 해야 칠이 오래가고 칠의 장점을 고스란히 발휘하게 된다. 진정한 옻칠작업에서의 기술의 차이는 옻칠의 정제에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옻칠을 어떻게 했느냐이다. 옻칠 상품의 품질과 가치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백골을 곱게 사포질하고 초벌칠을 하고 미세한 흠집을 메우는 눈메 메우기 작업을 마치고부터는 다시 사포질과 옻칠을 8-10회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목기칠인 경우일 뿐이다. 건칠이라는 기법이나 자개를 시문하는 나전칠기의 경우는 단지 옻칠을 칠하여 완성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말이 8-10회지 그 과정 과정마다 사포질하고 씻고 눈메 메우고 또 사포질하고 또 씻고 털고하는 식으로, 한 번 칠을 할 때마다 5회 정도의 잔손이 가야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옻칠 작업을 할 때는 25-30℃온도와 60-70의 습도를 유지해야 칠이 곱게 건조가 된다. 마지막으로 자개가 있는 제품은 부드러운 천으로 자개의 광을 내기도 한다.

조각으로 문양을 새겨 넣거나, 금, 은, 청동가루를 써서 그림을 그리고, 자개를 오려서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모든 기를 손끝에 담아내야 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한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을 셈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거기다 한 가지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려지기 때문에 6개월 공이 허사로 돌아가는 일도 다반사다.

이의식 명인은 2006년 첫 개인전 작품으로 건칠 항아리와 팔각 과반, 운학문호족반, 애기 삼층장 등이 있다. 팔각 과반은 천판이 팔각으로 이루어진 과일접시를 놓아 나르는 소반으로 천판면에 물고기 문양을 새겨 넣었다. 또 운학문호족반은 음식을 담은 그릇을 두고 나르는데 사용한 소반은 이동하기 편리하게 가벼운 재질의 나무를 사용하여 작게 만들었다. 전체적인 모양에 따라 사각반(四角盤), 호족반(虎足盤), 구족반(狗足盤), 일주반(一柱盤) 등으로 다양하게 있다. 호족반은 다리가 호랑이 다리와 같이 날렵하게 생겼다고 하여 호족반이라 부른다.

이 외에도 국화문 흑칠 대궐반(은행나무, 삼베, 건칠분, 은), 국화문 주칠 대궐반(은행나무, 삼베, 건칠분, 은), 봉황문 대궐반(은행나무, 삼베, 색칠), 주칠 호족반(은행나무, 삼베, 주칠), 모란 국매화 사주함(은행나무, 삼베, 건칠분, 나전), 국화문 삼층장(괴목, 은행나무, 삼베, 건칠분, 은), 운학문 구절판(홍송, 삼베, 나전, 색칠), 국화산수문 쟁반(은행나무, 삼베, 나전, 금), 임진강변 산수문 쟁반(은행나무, 삼베, 나전, 금) 등이 있다.​
 

 

옻칠의 과거와 미래

칠기(漆器)는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칠을 나무로 된 제기(祭器)나 그릇 등 공예품에 칠한 물건을 말한다. 서양에서 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공예품으로 귀한 그릇의 대명사로 통용되었다. 

칠기는 중국 상(商)나라 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그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원삼국시대의 유적인 창원 다호리에서는 형태가 남아 있는 다양한 종류의 귀중한 칠기가 발견되어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독자적인 칠기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삼국시대에도 당시에 제작된 전칠관(乾漆棺), 칠반(漆盤), 두침(頭枕) 등 칠(漆)을 입힌 물건들이 많이 발견될 정도로 옻칠공예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칠합(漆盒), 칠연(漆硯) 등의 유물이 만들어질 정도이고 칠전(漆田)이라는 관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칠기제작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 이전에는 목심칠기(木心漆器), 건칠(乾漆) 등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나전칠기(螺鈿漆器)가 우세하여 순 옻칠제품은 많이 생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이후에도 조선을 거쳐 그 전통은 계속 이어져 최근에까지 옻칠 기법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옻칠은 옻나무 진의 불순물을 제거하여 도료로서 만든 후 나무 그릇이나 가구 등에 칠을 하는 것으로, 옻칠을 정제하는 기술고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옻칠장이라 한다. 전문적인 교육의 시초로서 태천 칠공예소가 있었으며 일제시대의 총독부 중앙시험소에 의해 나전칠기가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문적인 교육장이었던 태천 칠 공예소가 없어진 후, 전주에서는 전라북도 목기 기술학교 칠공과가 생기면서 연구 및 기술 개발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문화재청에서 옻칠장을 지정하여 전통적인 옻칠기술의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옻칠은 수액을 채취하는 시기, 부위에 따라 초칠, 성칠, 말칠, 지칠, 화칠로 불린다. 옻나무 표피에 상처를 내면 그 상처로부터 유회백색의 유액이 나오는데 이를 천연옻칠이라 하며, 채취한 천연옻칠의 불순물을 여과한 것을 생옻칠이라 하고 이를 정제하면 정제 옻칠이 된다. 옻칠의 독기는 세균의 번식을 막는 효과가 있어 그릇으로 사용하면 접촉성 감염과 질병 예방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한 방수, 방열, 방습 효과가 뛰어나 공예품과 공산품의 최고 도료로 활용되고 있다. 웰빙이라는 이름아래 천연 도료와 나무를 원재료로 하는 옻칠 그릇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지역 문화관광 상품으로도 옻칠 제품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듯이 옷은 식용 및 약용으로도 많이 쓰인다. 그래서 옻오리나 옻닭을 먹는다. 특히 옻은 가래 및 기침 등에 효과가 있으며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이나 몸이 차가운 사람의 허한 기운을 보충해 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밖에 옻칠과 제품의 재료가 되는 나무는 열전도도가 낮은 특성으로 인해 뜨거운 음식을 다룰 때에 아주 좋다. 

옻칠 제품으로는 찻잔, 찻상, 주전자, 제기, 반상기, 접시, 물컵, 수저, 녹차통, 구절함, 보석함 등이 있다.

옻칠은 오늘날 가장 확실한 미래형 소재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서구에서는 옻칠이 첨단제품이나 고급 만년필의 외장재로서 탈바꿈하고 있다. 이제 옻칠은 동아시아를 넘어 인류 보편의 정서에 수렴하는 오래된 미래의 문화코드임에 분명하다.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우리나라의 식기문화가 사라졌다. 흔히 보이던 밥그릇 도자기 하나까지 이제는 사라진지 오래다. 서양의 문물이 들어서고 공산품이 우리의 밥상을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의 전통문화인 옻칠이 있다. 전통의 호흡을 고르고 거기에 다시 새로운 리듬을 부여하는 일의 중심에 옻칠장 이의식 명장이 자리한다. 그는 ‘공예는 쓰임’이라고 말한다. 공예의 본래의 의미를 되새기며 옻칠 그릇도 식탁 위나 방 안에 자리하고 쓰일 때 비로소 참다운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이 명인은 믿고 있다. 그는 결코 서두르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묵묵히 그릇을 만들어 내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옻칠이 천직이려니 하며 그저 혼신을 다해 몰두하는 이의식 명인은 이 시대의 희망이다.

이 시대가 여망하는 마지막 장인정신이 그의 온몸 속에 엄연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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