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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엄재수
  • 종사분야
  • 선자장 / 합죽선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 지정날짜
  • 2012.08.03
  • 주소
  • 전주시 완산구 은행로 67
  • 이메일
  • misun243@hanmail.net
  • 기타
무형문화재 소개

소년시절부터 부친인 엄주원 선생과 함께 합죽선 작업에 참여하였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합죽선 제작 공정을 전수받았다. 1997년 미선공예사를 인수하여 운영하면서, 일제 강점기이전의 부채들을 연구하여, 유물과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살대 위에 옻칠을 올리는 기법과 합죽 대륜 칠선, 오십살 백접 칠선 등을 재현하였다.

 

우리나라 부채 역사 천년. 그 긴 시간동안 부채는 여름철 간단하게 바람을 일으키는 생활 속 도구에서 시작해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서도 합죽선은 고도의 기술과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명품이자 예술품으로 사랑받아 왔다.

그가 잃어버린 우리 부채를 재현해 내는 일에 몰두하는 까닭은 지금 세대에 해놓지 않으면, 결국 옛 합죽선들이 영원히 박물관이나 고문서 속에만 갇혀 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 앞으로도 그는 합죽선 복원작업과 함께, 재현한 합죽선에 현대적 부채의 쓰임들을 접목해 내는 작업들을 진행할 예정이다.

 

엄재수 명인은 2012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다. 하지만, 부채에 관해서 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게 오랜 세월 함께 해왔다. 그의 아버지는 근대부채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명인인 엄주원(작고) 명인. 어렸을 때부터, 재료를 구하러 다니는 일이며, 전시준비 등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부채 일을 배워왔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업을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언젠가는 이 일이 내 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은 일찍부터 해왔다.

 

엄재수 명인은 현재 잃어버린 우리 합죽선을 복원해 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찬란하게 꽃피웠던 우리 합죽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엄재수 명인은 옛 선자장들의 유품 하나하나, 옛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채에 관한 한구절한구절들을 보며, 옛 합죽선을 재현해 내려 애쓰고 있다. 대륜선, 칠부채, 백접선, 대모선, 우각선, 금반죽선 등 지금껏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세상에 빛을 본 합죽선의 종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가 잃어버린 우리 부채를 재현해 내는 일에 몰두하는 까닭은 지금 세대에 해놓지 않으면, 결국 옛 합죽선들이 영원히 박물관이나 고문서 속에만 갇혀 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 앞으로도 그는 합죽선 복원작업과 함께, 재현한 합죽선에 현대적 부채의 쓰임들을 접목해 내는 작업들을 진행할 예정이다. ​

 

2008년 제7회 한국 옻칠공예대전 동상

2009년 제34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라이프스토리

 

 

우리나라 부채 역사 천년. 그 긴 시간동안 부채는 여름철 간단하게 바람을 일으키는 생활 속 도구에서 시작해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서도 합죽선은 고도의 기술과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명품이자 예술품으로 사랑받아 왔다. 

 

엄재수 명인은 2012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다. 하지만, 부채에 관해서 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게 오랜 세월 함께 해왔다. 그의 아버지는 근대부채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명인인 엄주원(작고) 명인. 어렸을 때부터, 재료를 구하러 다니는 일이며, 전시준비 등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부채 일을 배워왔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업을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언젠가는 이 일이 내 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은 일찍부터 해왔다.

 

엄재수 명인은 현재 잃어버린 우리 합죽선을 복원해 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찬란하게 꽃피웠던 우리 합죽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엄재수 명인은 옛 선자장들의 유품 하나하나, 옛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채에 관한 한구절한구절들을 보며, 옛 합죽선을 재현해 내려 애쓰고 있다. 대륜선, 칠부채, 백접선, 대모선, 우각선, 금반죽선 등 지금껏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세상에 빛을 본 합죽선의 종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가 잃어버린 우리 부채를 재현해 내는 일에 몰두하는 까닭은 지금 세대에 해놓지 않으면, 결국 옛 합죽선들이 영원히 박물관이나 고문서 속에만 갇혀 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 앞으로도 그는 합죽선 복원작업과 함께, 재현한 합죽선에 현대적 부채의 쓰임들을 접목해 내는 작업들을 진행할 예정이다. ​ 

 

 

잃어버린 옛 부채를 찾다

우리나라 부채 역사 천년. 그 긴 시간동안 부채는 여름철 간단하게 바람을 일으키는 생활 속 도구에서 시작해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중에서도 합죽선은 고도의 기술과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명품이자 예술품으로 사랑받아 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저가의 일본부채 유통으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온 합죽선들 중 상당수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엄재수 명인은 잃어버린 합죽선을 복원하고 재현해 내는 우리시대의 명인이다.​ 

 


 

최고의 명품 부채, 합죽선

우리 조상들은 부채가 여덟 가지의 덕을 지니고 있다하여, 팔덕선이라 불렀다.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혀주는 역할 이외에도 일곱 가지의 덕목이 더 있다는 것이다. 부채는 서늘한 바람도 주고 따가운 햇볕을 막아준다. 때로는 먼지와 바람을 막아 내기도 하고, 춤추고 노래할 때는 그 화려함으로 흥을 돋우는 역할도 한다. 모기와 귀신을 내쫓기도 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부채는 사랑 받으며 남녀노소, 계절을 불문하고 예부터 우리 조상들의 필수품으로 사용되어 왔다. 

 

부채는 크게 단선과 접선으로 나뉜다. 원선 혹은 방구부채라고도 불리는 단선은 그 모양과 형태가 정해져 있는 부채를 말한다. 접선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부채를 말한다. 접어 쥐고 다니기 편해, 쥘부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접선의 대표적인 부채가 합죽선이다. 말 그대로 얇게 켠 대나무 껍질 두 개를 합해 만들었다고 해서, 합죽선이라 이름 붙여진 부채다. 한자루의 합죽선을 만들기까지는 무려 백여덟 번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 까다로운 합죽선은 고도의 기술과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명품이다. 전주를 대표하는 전통자원이기도 하다. 전라감영 소속의 선자청에서 만드는 합죽선은 임금에 진상될 정도로 으뜸으로 쳤다고 하며, 오늘날에는 전주 특산품으로 맥을 잇고 있다. 

 

 

 

백여덟 번의 공정을 거쳐야 탄생되는 합죽선은 크게 여섯 개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를 육방이라 부른다. 초조방은 대나무를 잘라 얇게 깎아낸다. 초조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대껍질을 일흔여섯 개씩 묶어 정련방으로 넘기면 이곳에서 민어의 부레를 삶아서 만든 부레풀로 대껍질 두 개를 하나로 붙이고 완전한 부채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낙죽방은 장식을 하는 곳이다. 낙죽은 속살과 변죽에 인두로 문양을 그려 넣는 작업을 말하며, 주로 속살에는 박쥐, 운학, 꽃 등의 낙죽을 새기고, 변죽에는 매화꽃 무늬를 주로 그려 넣는다. 네 번째 방인 광방에서는 말 그대로 광을 내고 속살을 매끄럽게 한다. 풀 때 닦아내기, 살치기, 세말따기, 변죽광내기, 끝살치기, 부골따내기 등 지금까지 만들어진 부채의 모든 부분을 곱게 다듬는다. 이후 부채는 도배방으로 넘겨진다. 도배방은 부채의 종이를 붙이는 곳이다. 부채에 맞게 재단한 한지를 부챗살 수에 맞게 접어, 부챗살에 붙이는 작업을 한다. 사북방은 부채 만드는 과정의 마지막 작업이다. 백동이나 황동, 은 등으로 만들어진 장식용 고리인 사복으로 부채의 머리를 고정한 후 최종검사를 하면 부채가 완성된다. 이 과정을 거쳐 합죽선이 완성되면 취향에 맞게 선면에 그림이나 글씨 등을 넣어 운치를 더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합죽선은 만들어진 재료와 형태, 장식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변죽의 바깥 편에 뿔을 대어 장식한 외각선(外角扇), 반대로 변죽 안쪽에 뿔을 댄 내각선(內角扇), 변죽을 대나무, 뿔, 나무 등 세 가지 재료로 세 곳에 접합해서 장식한 삼대선(三臺扇), 변죽의 두 곳을 접합한 이대선(二臺扇),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변죽에 마디가 있는 대나무를 붙여 만든 죽절선(竹節扇), 붉은 박달나무를 변죽에 붙여서 만드는 단목선(丹木扇) 등이 변죽의 장식에 따라 다르게 불려지는 합죽선의 이름이다. 또한 부채의 머리 부분인 군안의 모양이 승려의 머리를 닮은 듯 둥근 모습일 때는 승두선(僧頭扇), 머리 모양이 뱀 머리나 물고기 머리 모양으로 조금 뾰족한 모습일 때는 사두선(蛇頭扇), 어두선(魚頭扇)이라고 불렀다. 다른 합죽선의 이름에는 부채를 폈을 때 180도 이상 펴지는 부채를 광변선(廣邊扇), 펴진 부채의 각도가 180도 이하 일 때는 협변선(狹邊扇), 사복에 선추를 맬 수 있는 고리를 단 유환선(有環扇), 고리가 없는 무환선(無環扇) 등이 있다.

 

합죽선은 조선시대에도 최고급 부채로 선비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애장품이었다. 선비들은 선면에 시나 그림을 그려 넣어 자신을 표현했다. 사북 고리에 호화스런 매듭이나 귀금속을 달아 신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의 합죽선은 의관의 마지막으로 인식되어 선비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이 부채를 들어야만 외출을 하였다. 이렇게 합죽선은 자신을 나타내는 특별한 물건으로 사용되어 졌기에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녔으며, 이러한 이유 이외에도 물건이나 사물을 가리킬 때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채를 이용하였고, 보지 않아야 될 것이 보일 때는 눈을 가려 예의를 지키는 기물로, 혹은 도적들의 칼을 비켜 쳐내는 호신의 물건으로도 사용되어졌다. 부채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의해 조선의 삶을 이끌어 가던 선비들과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함께한 의관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합죽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명맥이 끊어지고 만다. 민족말살정책과 함께 대량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부채가 퍼지면서다. 엄재수 명인은 옛 기록과 선자장의 유품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 전통부채를 재현해 내고 있다. ​ 

 

 

아버지의 뒤를 잇다

엄재수 명인은 2012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다. 하지만, 부채에 관해서 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게 오랜 세월 함께 해왔다. 그의 아버지는 근대부채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명인인 엄주원(작고) 명인. 어렸을 때부터, 재료를 구하러 다니는 일이며, 전시준비 등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부채 일을 배워왔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업을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언젠가는 이 일이 내 일이 될 것이라는 예감은 일찍부터 해왔다.

 

“어렸을 적부터 늘 아버지를 따라다녔어요. 재료구하는 데서부터 각종 회의, 전시까지 늘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다니셨죠. 아버지께서 특별히 가업을 이으라는 말씀을 안 하셨지만, 그때부터 언젠가는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어요.”

 

정작 대학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한 엄재수 명인은 1983년도 대학입학과 함께 변죽에 치장을 하는 낙죽작업을 시작으로 조금씩 부채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대학졸업 후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전공을 살려 방송국과 연구소에서 일하기도 했고, 개인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부채 만드는 일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았다. 엄재수 명인은 1989년 아버지 엄주원 명인을 스승으로 정식으로 입문, 가업을 잇는 합죽선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합죽선을 만드시는데 아버지께서는 일평생을 바치셨어요. 열여덟 살에 부채일을 시작하셨으니 40~50년 동안 부채 만드시는 일만 하셨어요. 그 세월 동안 정말 밥 먹고 잠 자는 시간 이외에는 줄곧 앉아서 부채만 만드셨어요. 심지어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우시다고 물도 많이 안 드실 정도였죠.”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엄재수 명인은 부채에 대한 열정과 애정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애틋하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고 하면 아주 어릴 적부터 오직 한가지 밖에 없어요.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작업대 위에서 대나무와 씨름하시던 모습이죠. 어린 시절 이른 새벽 선잠을 깨면 언제나 귓가에선 아버지가 칼 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당대 최고의 합죽선 장인이셨던 문준하 선생님을 만나게 되셨어요. 그날부터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열심히 작업에만 전념하셨죠. 그렇게 배우셔서 인후동 가재미에서 독립하실 수 있었어요. 부채로 가족들의 끼니를 해결될 수 있게 된 거죠.”

 

언제나 좋은 물건은 누구라도 알아보는 법. 유난히 손재주 좋던 엄주원 명인의 부채는 곧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화려한 수상경력을 거쳐 1997년도에는 장인들에겐 최고의 자리인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연구하는 자세로 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을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며 세상이 당신을 알아주는 것 이상으로 더욱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외부의 일은 일체 하지 않으시고 작업에 더욱더 몰두 하셨어요.”

 

이런 엄주원 명인 아래서 엄재수 명인은 부자지간이 아닌 스승과 제자로 엄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 자신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까지도 부채 만드는 일에 매달리면서, 제자이자 아들인 엄재수 명인에게는 혼이 담기지 않으면 명품이 나오지 않는다며 더욱 정진할 것을 독려했다. ​
 

 

 

옛 부채를 복원하다

엄재수 명인은 현재 잃어버린 우리 합죽선을 복원해 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찬란하게 꽃피웠던 우리 합죽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엄재수 명인은 옛 선자장들의 유품 하나하나, 옛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채에 관한 한구절한구절들을 보며, 옛 합죽선을 재현해 내려 애쓰고 있다. 대륜선, 칠부채, 백접선, 대모선, 우각선, 금반죽선 등 지금껏 그의 손을 거쳐 다시 세상에 빛을 본 합죽선의 종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본격적으로 제작기법을 전수받았어요. 그런데 옛날 우리 조상님들이 만들었던 전통 합죽선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제작 기법이 체계화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파고들면 들수록 어려웠죠.”

 

전통 합죽선은 선비가 죽어서도 부장품으로 함께 묻혀 그 유물의 수가 많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합죽선들은 부채공예가 최고조로 발달했던 조선 영‧정조 시대부터 만들어진 작품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라고도 일컬어질 만큼 사회경제문화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던 영‧정조 시대에는 국가의 제제조치에도 불구하고, 솜씨가 뛰어난 선자장들이 소장자들의 주문을 받아 고가의 작품들을 만들어 남긴 시기다. 이때 만들어진 합죽선은 그 치장이 바다거북의 등껍질인 대모를 비롯하여 우각, 금반죽, 귀갑죽, 나전, 조각, 칠기법 등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게 접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런 합죽선의 제작기법은 거의 대부분 소멸되고 말았다.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마디대가 올려 진 합죽선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는 것 또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화려했던 우리 부채의 치장기법이 상당부분 실전되어, 사람들이 화려하게 발달했던 다양한 합죽선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
 

 

 

“조선 말기까지 화려하게 만들어지던 합죽선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제의 전통장인 말살정책과 저가(低價)의 일본부채로 인하여 침체일로를 걷게 되었어요. 이로 인해 당대의 장인들과 2대장인들이 작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그 화려했던 기법들이 전수되지 못하게 된 거죠. 그나마 극소수의 장인에 의해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던 합죽선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수요가 늘어 내공장(內工匠)의 맥을 이어온 장인(匠人) 김씨와, 외공장(外工匠)의 맥을 이어온 장인(匠人) 문씨에 의해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당시의 작업형태는 일부자본가들이 재료를 공급하고 장인들이 지금의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부근에서 집단으로 모여 분업화한 작업을 하는 것이었죠. 근데 이때의 합죽선은 조선시대의 화려함은 이미 많이 잃은 상태였어요. 작고 왜소할 뿐만 아니라, 몸통 부분의 곡선이 거의 사라진 형태로 작업되어졌어요. 부채 머리 부분(扇頭)은 대구 도축장에서 구매한 소의 다리뼈를 사용했고, 사북은 50년대에는 거의 백동이 주류를 이루고, 60년대에 들어서면 양은과 백동이 같이 사용되어졌어요. 

 

시대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격변의 시대 인만큼 작업방법과 사용되어지는 재료에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된 거죠. 현재의 부채가 정착하기 까지는 격변기의 변화를 거쳐서 만들어지게 된 거에요. 작업기법이 변하고 재료가 변하였어도 원래 부채의 모양과 기법을 찾아 재현하고, 화려했던 그 모습들을 복원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완성된 모습을 기반으로 현대와 미래에 어울리는 부채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재탄생 시키는 것도 현대를 사는 장인들과 우리 후손들이 만들어 가야할 과제인거죠.” ​

 

 

지금 그것들을 다시 되살려 놓지 않으면, 어쩌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다급함에 엄재수 명인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옛 합죽선들을 토대로 복원작업부터 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옛 합죽선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자료를 찾았다.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부탁도 많이 했다. 하지만 자료조차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재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시도했다.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엄재수 명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엄주원 명인의 유품 속에서 책 한권을 발견한 것이다. 부채 전시 도록이었다. 그 책 한권으로 잊혀 질 뻔했던 우리 부채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부채의 선을 찾고, 겉대의 장식, 대모 올리는 방법 등을 그 책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유품 속에는 엄주원 명인이 오래전부터 모아두었던 소의 다리뼈와 물소의 뿔, 거북이 등껍질도 있었다. 

 

“조선시대 합죽선을 재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우연히 아버지 유품 속에서 한권의 책이 흘러나왔어요. 조선말기의 부채를 모아 전시했던 전시회 도록이었죠. 그 책 한권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우리부채의 선을 찾았고, 겉대의 장식에 나전기법이 어떻게 사용되어졌었고, 대모가 어떻게 올려 졌는지를 알아내어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책은 찾았는데 이번에는 재료를 구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대모 올리는 방법을 직접 해보고 싶어도 어디 거북이 등껍질을 구할 수가 있어야죠. 그러던 중에 이번에는 창고구석에서 오래 전에 아버지께서 모아놓으신 소의 다리뼈 두가마니와 물소의 뿔 한가마니, 그리고 깊이깊이 숨겨두셨던 거북이 등껍질 수 십장을 찾아냈어요. 아버지께서도 이미 오래전에 재현을 위해 준비해 두시고도 생활이 먼저여서 시작하지 못하셨던 겁니다. 생각해보니 부채의 속살에 옻칠이 올라가지 않아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아버지께서 언젠가 작업 중에 농담처럼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었어요.”

 

엄재수 명인은 지금까지 대륜선, 칠부채, 우각선, 금반죽선을 비롯해 거북이등껍질을 겉대에 올리는 대모선과 왕실에서만 사용하던 백첩선까지 복원해 내었다. 조선 영‧정조 때 그 전성기를 누렸던 합죽선은 양반이라는 사대부 계급만이 사용했던 물건으로, 당시 국가에서도 신경을 쓰던 사치품이었다. 어떻게 사치를 부렸는지를 통해 부채의 이름이 정해지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사치는 부챗살 수였다. 백첩선은 왕과 그 친계인 대비, 중전도 각각 한 자루씩 가지고 있지 못했다. 대를 종잇장처럼 얇게 깎아 내기도 어렵고 또 거기에 종이를 접어서 붙이는 작업은 최고 숙련된 장인도 하기 까다로웠던 때문이다. 

 

“부채는 역사가 천년입니다. 그 긴 시간동안 얼마나 수많은 장인들이 얼마나 많은 시도와 실험을 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얼마나 많은 부채들이 만들어 졌겠어요. 일단은 잃어버린 부채를 되찾고 여기에 현대적인 부채의 쓰임들과 감성을 접목해 ‘현재적 명품부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해요. 아직도 복원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요즘은 옻칠과 황칠, 그리고 유지칠 등 부채의 칠에 관심을 갖고 있죠.”​

 

 

 

이런 노력들을 바탕으로 엄재수 명인은 대를 이어온 명인으로서 그 가치를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이미 엄주원 명인이 제작한 부채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용했던 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엄재수 명인이 제작한 부채를 사용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시장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경남 양산시가 해외 각국 대사 열네 명에게 보낸 합죽선 선물도 엄재수 명인의 작품이다. 특히 지난 2002년 월드컵 타임캡슐에 보관한 것과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영 씨가 우주에서 무중력 상태를 실험할 때 사용해 화제를 모았던 부채도 엄재수 명인의 작품이었다. 최근에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의 작품에 관심이 높아져 전국의 백화점에서 그의 작품들이 전시판매되기 시작했다. 

 

“부채는 먼저 견고하고 모양에 흐트러짐이 없어야 해요. 또 손에 꼭 맞아 오래 쥐고 다닐 수 있고, 잘 펴지고 잘 개져야 합니다. 그 모양새는 한복을 여미어 입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고, 옆모습을 봤을 때 머리모양은 크고 둥그스러워 손에 걸림새가 없고, 목 부분에서 가늘어져서 손에 쏙 들어와야 하며, 목살부분에서 다시 커져 손에 잘 맞아야 해요. 마감에 있어서는 갓피가 부드럽고 견고하게 붙어 있어야 오래 사용하여도 변함이 없어요. 이런 부채를 선조들은 좋은 부채라며 애첩처럼 여겨, 한지가 헤지면 종이면 교체하면서 후대에 물려주지도 않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 정도로 아꼈죠.”

 

이런 합죽선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엄재수 명인의 부채는 이미 우리 전통의 부채를 재현한 것을 넘어 한 차원 더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부채도사가 살고 있는 부채박물관, 미선공예사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미선공예사는 그의 작업장이자 판매장이면서 전시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미선’은 그의 아버지 고 엄주원 명인의 호이다. 이곳에서 엄재수 명인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사라진 전통부채를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그가 엄주원 명인에게 가르침을 받는 장면을 찍은 사진과 엄주원 명인의 무형문화재 증서다. 입구를 들어서면 판매장이고 왼쪽 문을 열고 별실로 들어가면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넓지 않은 이곳에는 그가 고생하며 수집한 부채들과 엄주원 명인이 만든 부채, 그리고 엄재수 명인이 복원한 부채들로 가득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전시장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조금 무리해서 한옥마을에 부채 전시관을 마련했죠. 이곳을 통해 우리의 살아 숨 쉬는 부채 문화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사랑받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전시관에는 우리 합죽선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부채들을 전시 놓았다. 나라마다 각양각색의 특색을 갖고 있는 부채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에서 엄재수 명인은 우리 부채의 예술성을 전도하는 알림이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접었다 폈다하며 사용하는 쥘부채의 경우 아직 그 시초가 어디인지 명확하지가 않아요. 어떤 자료에는 일본이 먼저라고 하고, 또 어떤 자료를 보면 고려가 시초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우수함으로 인해 고려의 쥘부채가 동아시아 각국에 널리 퍼졌고, 그로 인해 갖는 의미와 가치가 크다는 것이에요. 

 

쥘부채는 접고 펴서 쓸 수 있다는 편리함 때문에 근대에 와서는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었지만, 만드는 재료와 형태를 보면 각 지역마다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특히 쥘부채라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서 오랜 시간 사용한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중국의 부채는 몸채를 만드는 재료로 대나무를 주로 사용하고, 그 외의 재료로 종이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슷한 모습이죠. 하지만 몸채로 되어 있는 대나무를 가공한 모습과 종이를 붙이는 방법에는 세 나라 모두 크게 차이가 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나라 부채는 합죽, 즉 두 쪽의 대껍질 부위를 붙여서 만들지만 일본과 중국의 부채는 두께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쪽의 대나무 속살을 사용해 부챗살을 만들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대나무와 중국, 일본 대나무의 특성의 차이 때문이죠. 우리나라 대나무는 대나무의 북방한계점 가까이에 있으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심한 기온차를 견뎌내야 하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의 대나무에 비해 나무의 육질이 더 조밀하거든요. 이 때문에 탄성이 뛰어나고 광택이 있어서 대껍질을 붙여 부챗살로 사용할 수 있지만, 일본이나 중국의 대나무는 육질이 물러서 합죽을 해도 우리나라 대나무와 같은 탄력과 강도가 없어 대나무 껍질부분만을 사용하여 부채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죠.”

 

엄재수 명인의 설명을 듣다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그러고 보니, 세 나라의 부채 생김새는 크게 다르다. 부채 속살의 숫자 역시 차이가 많다. 우리나라의 합죽선은 많은 살을 사용해 살과 살 사이가 촘촘해서 틈을 볼 수 없을 정도인데 반해, 중국과 일본 부채의 속살은 살 사이가 상당히 벌어져 있다. 

 

“현재 만들고 있는 한국 부채의 살수는 속살 38개에 겉살인 변죽 2개를 합해서 40개 내외인데 비해서 중국이나 일본의 부채는 10개 내외의 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이를 붙이는 방법에도 차이가 나요. 중국이나 일본 부채의 종이는 앞면이나 뒷면이 그 차이가 없고 부챗살이 종이 사이에 묻혀 있어서 볼 수가 없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합죽선은 부챗살이 보이지 않는 앞면과 부챗살이 보이는 뒷면을 확연히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부채는 종이가 헤지면 버리는 일회성 부채지만, 합죽선은 종이를 교환하여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부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는 각 나라의 기후와도 연관이 있어요. 습도가 많은 일본은 부채에 올리는 종이로 기름을 먹인 것 같은 코팅된 종이를 사용합니다. 또한 습기를 먹은 종이는 쉽게 접을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접어지게하기 위하여 살수를 적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본 부채는 종이를 올려붙이는 방법으로 두 장의 종이를 붙이고 그 사이에 부챗살을 끼워서 만드는 일명 뀌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요. 그래서 부챗살의 끝이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역시 일본 부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요. 아마 종이 사이에 부챗살을 끼워서 종이를 올리는 방법이 접어서 붙이는 방법에 비해 훨씬 쉽게 만드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번엔 부채를 잡는 손잡이 부분을 보세요. 일본과 중국은 얄팍해서, 두툼하게 모여서 만든 우리나라 부채의 머리 부분과는 전혀 다르죠. 부채를 접어서 옆으로 보았을 때 중국이나 일본의 부채는 좁고 가느다란 모습이지만, 한국의 부채는 다분히 넓고 입체적이에요. 우리나라의 부채는 두 장의 대껍질을 붙여서 두꺼워진 윗부분을 사복으로 꽉 조여 놓았어요. 그러다가 사복 아래 부분은 서서히 부풀어 오르듯 퍼지다가 한 장의 대껍질로 되어 진 맨 아래 부분에서 다시 다소곳이 모인모습이 마치 한복을 입은 옛 한국 여인네의 실루엣을 보는 듯하지 않나요? 다른 나라의 부채들에 비해 우리 합죽선은 훨씬 높은 예술성을 갖고 있는 명품이라는 거죠.”

 

요즘 그는 부채 복원과 함께 이제는 문헌과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전통 합죽선의 제작기법을 체계화 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동시에 우리 부채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합죽선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부채의 역사와 쓰임새, 제작과정 등을 담은 총서를 발간하는 것이다. 

 

“아직도 복원 못한 부채들이 많죠. 이대선과 삼대선을 복원하지 못했어요. 옛 문헌에는 이대선과 삼대선이라는 용어가 나와 있는데, 여기에 대한 설명을 아직 못 찾은거죠. 유물이나 사진도 아직 못 찾았고요. 요즘은 <미암일기>라는 책을 보고 있어요. 부채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계속 새로운 부채 이름을 찾아내고, 또 부채를 설명하는 자료를 찾아내야죠. 자료를 찾아내어야 옛날에 어떤 부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또 그래야 복원도 가능할 수 있는 거니까요. 다행히 주변에 역사학을 연구하는 친구나 후배들이 많아서 오래 전부터 부채 관련된 자료들이 나오면 계속 추적해서 모아두라고 부탁했어요. 실제로 이들이 찾아주는 자료도 많고요. 앞으로도 부채 복원뿐만 아니라 관련 자료들을 계속 찾으면서 공부해야죠. 부채를 복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부채의 뿌리를 찾아내는 것도 우리 세대가 해야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런 작업에 몰두하는 까닭은 지금 세대에 해놓지 않으면, 결국 옛 합죽선들이 영원히 박물관이나 고문서 속에만 갇혀 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 앞으로도 그는 합죽선 복원작업과 함께, 재현한 합죽선에 현대적 부채의 쓰임들을 접목해 내는 작업, 그리고 우리 부채의 뿌리를 찾는 작업들을 계속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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