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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故김재중
  • 종사분야
  • 소목장 / 전통창호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19호
  • 지정날짜
  • 2000.11.24
  • 주소
  • 전주시 완산구 추동길 70-8
  • 이메일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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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소개

김재중 장인은 1944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16살이 되던 해 목공소에 처음 발을 디딘 그는 첫 스승이 었던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고택용 선생의 권유로 소목일을 시작하게 됐다. 어느 사찰의 문에 마음 을 빼앗겼던 그는 전통창호 기술을 배우기로 하고 장인들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전통창호는 아귀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목재를 정확하게 가공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는 사궤가 딱딱 들어맞을 때의 전율을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낸 기분이라고 말한다.

 

김재중 장인이 전통창호 전문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롯데월드 민속관 창호를 제작하면 서부터다. 그의 창호는 절제된 비례미와 중후함,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녔다. 특히 전통창호 기 법 중에서도 불교 예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꽃살문 재현에 있어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김제 금 산사 대적광전 꽃살문, 고창 선운사 창호 등 전국 사찰을 비롯해 경기도 용인의 민속촌, 전주향교 창 호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와 주 덴마크 한국대사관저 내부공간 인테리어에도 그의 작품이 활용 돼 밖의 기운을 차단시키는 현대식 창과는 다른 우리 고유의 전통창호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다.

 

·1944년 전주 출생

·1998년 한식목공 문화재수리기능보유자 지정, 국가기술자 목재창호 2급 취득, 전북기능경기대회 창호부문 금상 수상

·2000년 무형문화재 소목장 전통창호보유자 지정
·현재 전통한옥문연구소장

라이프스토리

 

 

소목장으로 지정되다.

김재중 명인은 촌부의 자식으로 출생한 4대 독자이다. 9살 때 부친을 잃은 김 명인은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17살 때 그는 생계유지를 위해 소목 일을 배우기로 결심했고 소목장 이동희 선생님 문하생으로 입문하였다. 그 후로 김재중 명인은 한번도 쉬거나 다른 직업을 가져 본 적이 없다.

1997년 봄 김 명인은 전라북도 전통공예인협회 소병진 회장님과 최동식 부회장님 몇 분과 몇 교수님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김 명인을 찾아와 협회 가입을 권유했다. 그래서 김 명인은 전북 전통공예인협회에 가입했고 협회를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되었다. 같은 해 김 명인은 전북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했고 거기서 창호 금메달을 수상하는 한편 국가기술자자격 창호 2급에 합격했다. 

소목장 김재중 명인은 전통창호 제작에 50년 넘게 종사하며, 창호 기법의 전수 및 보존에 기여하고 있고 궁궐, 사찰, 서원 등 전통 건축물의 창호제작 및 원형보존을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산사 대적광전, 서린사, 고창 선운사, 고창 묘향성 각 사찰, 향교의 창호를 들 수 있다.

김재중 명인의 전통창호는 건축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균형 잡힌 비례미와 화려한 장식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는 창호제작에서 보이는 세밀한 처리과정으로 ‘줄 마무리’가 견실하고 시각적인 중후함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김 명인은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전통 공예인으로의 긍지가 남다르고 전통미를 전통기법으로 보존하려고 하는 신념이 강하다. 이에 김 명인은 2000년 11월 24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19호 소목장(전통창호)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살았다. 

현재 전주에서 전통한옥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 명인은 50년이 넘게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 이 시대의 독보적인 창호장이다. 

고생한 이야기를 말한다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는 김 명인은 ‘아침은 시래기죽 한 그릇으로 때우고, 점심은 공장에서 먹고, 일이 끝나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야간학교 공부를 하는 고단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손이 얼어 연필을 잡을 수 없을 때면 입김으로 손을 녹여가며 공부를 했고, 배가 고프면 작두 물질을 하여 물로 배를 채워가며 살았다. 저녁에는 옷을 입은 채로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백기 그릇에 떠다 놓은 물이 얼음으로 변해있을 정도로 김 명인은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고생하던 시절, 화장실에 가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던 적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는 김 명인은 이제 그 시절을 생각하기도 싫다고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사찰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본 전통문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반해 이 길로 들어섰습니다.”
1944년 5월 16에 태어난 김재중 명인은 1961년 3월 전주 완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3월, 김재중 명인은 어려운 집안 형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기술을 배우기 위해 17세의 어린 나이로 창호제작업체 이동희 선생님 문하생으로 입문하였다. 이후 그는 박병로, 유양석, 박종철 선생에게서도 폭넓은 기술을 익혀 나름대로 풍부한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다. 
그가 처음 기술을 익히던 시절에는 어렵고 고된 일을 자청해서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본인 스스로는 창호일 자체가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는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마치 어려운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풀어낸 것 같은 기분에 희열마저 느꼈다고 한다. 학구열이 높았던 그는 낮에 고된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중퇴하긴 했지만 전주 영생고등학교 야간 2학년까지 마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 명인은 작업을 하던 중에 손가락을 크게 다쳤다. 그래서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하나 잃었다. 그는 비록 네 손가락만으로 일을 하지만 다섯 손가락 가진 사람 못지않다. 그것은 수십 년간 갈고닦은 실력 덕이다. 이제 그는 눈감고도 문을 제작할 만큼 실력이 쌓아졌다. 이 방면에서 그를 따라갈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김 명인은 창호의 전통기법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이 계통에선 탁월한 기술을 인정받고 있고, 그것을 증명하듯 다채로운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김 명인은 전북기능대회 금메달 수상을 비롯해 문화재 기능 보유자(제 1922호)로 정식 인정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전통공예인협회 이사이기도 하다.​

 

            
 

- 꽃살무늬의 최고권위자가 되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19호 창호장이자 지정문화재 전통 한옥문 기능보유자인 김재중 명인은 ‘꽃살무늬’ 제작에 관한한 국내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장인이다.

전통 창호란 보통 창과 문을 일컫는 말이지만 장지, 덧문, 두꺼비집 등을 통칭해서 부르는 용어이기도 하다. 전통창호의 기원은 동굴에 거주하던 원시시대로부터 출입구를 어떤 형태로든 막아 풍우와 한설을 차단하거나 외부의 침입자를 막은 데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 창호는 발전된 새로운 공법과 재료로 다양하게 개발되어 장구한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창호의 경우는 옛 그대로의 전통미를 보급계승하는 뜻에서 문양 선정부터 설치되는 장소와 시설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고 있다. 특히 창호 및 문양 제작과정은 아직까지도 전통 방식 그대로 모두 수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창호는 제작과정에서 접착제 사용이나 못을 일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특수 분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전통기법을 그대로 재현하는 장인’이라고 한다. 특히 꽃살무늬에 있어서 김 명인은 독보적인 존재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김재중 명인은 자신이 전통창호장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다.

꽃살무늬 표현은 연필로 표시한 금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육각의 형태 자체가 완성되기 어렵기 때문에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고난도의 기술이다. 창호는 작품성도 중요하지만 균형의 틀이 기본이고 전체 건축물과 문의 조화가 일치되도록 하는 안목이 필수적이다. 이에 김 명인은 오랜 현장경험에 의해 특유의 끼가 발동된다고 한다.

그동안 김 명인의 손길을 거쳐 완성된 작품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우선 진안 마이산 탑사 대웅전, 완주 송광사 지장전과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에 건립된 한옥들은 모두 김 명인의 손끝에서 재현되었다. 또한 잠실롯데월드 3층에 있는 민속관, 엑스포 민속관, 김제 금산사, 고창 선운사의 창호 등도 김 명인이 손수 재현했다. 남들은 그 가치를 모르지만 김 명인 본인은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 김재중 명인은 지난 5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회상하는 가운데 전국 방방곡곡의 유명사찰이나 관광지까지 자신의 작품들이 산재해있어 그동안 고생했던 시절을 보상받는 기분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이제 김 명인에게는 이 기법을 전수할 후계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통창호 기법이란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기법을 일체 변형시키지 않고 재현하는 것이 생명인데 요즘 일부 사람들은 송판을 오려 아교로 붙이는 경우가 있다. 김 명인은 이런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당사자는 물론 공사의뢰자까지 안쓰럽게 여겨진다. 이렇게 급격한 세태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 명인은 묵묵히 자신이 일에 몰두하며 전통의 멋을 살리는 데에만 혼신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내면에는 우리 옛 조상들의 장인정신이 굳건히 살아있는 것이다.

 

- 조용하면서 집념이 강한 남자

김재중 명인의 평소 성격은 조용하다. 그는 유별나게 끈질긴 집념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면서 이는 오랜 기간 서예를 하는 과정에서 길러진 인내심의 결과라고 한다.

또한 김 명인은 다분히 사교적이어서 주위에 친구들이 많다. 가끔은 친구들로부터 손해를 당한다는 느낌도 있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웬만한 것은 비록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려고 한다. 그래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김재중 명인은 창호분야에 정진하면서 언젠가 이 분야에서 제1인자가 되겠다는 목표 아래 살아왔기에 199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직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통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부분 ‘평소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라고들 대답 한다. 김 명인은 지금껏 남에게 마음 아프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라고 여긴다.

김 명인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당부하기를,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매사에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후회 없이 살자’라는 경구를 본인의 좌우명이자 집안의 가훈으로 정했다.

김 명인은 서예, 국악감상, 등산, 여행 등의 취미생활을 한다. 붓 잡은 지 20년이나 됐다는 서예는 훗날 나이가 들어 소일하는데 가장 적격일 것 같았다. 그동안 김 명인은 대한민국 원춘 서예대전에서 해서, 전서, 예서체로 특선을 두 번이나 차지했다. 현재는 전서 위주로 쓰고 있다. 그의 서예실력은 그동안 몇 개의 현판을 쓰는 것으로 발휘되기도 했다. 모악산 금곡사 일주문 현판, 대웅전 현판, 전주근교에 있는 고덕사 대웅전 현판 등, 그가 쓴 현판만도 대여섯 개나 된다고 한다.

그는 남달리 어릴 때부터 국악을 좋아했다. 김 명인은 판소리가 너무 좋아 명창들과 친해졌다면서 특히 박동진 선생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금새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가끔 틈이 나면 등산을 한다. 모악산, 고덕산 등지의 산을 찾는 김 명인은 정상에 오르면 맑은 공기도 좋지만 속세에서 찌들었던 잡념과 시름을 한방에 날려 버리는 기분이 최고라고 한다. 김 명인의 또 다른 취미인 여행은 주로 추울 때만 하게 된다. 그의 작업 성격상 겨울철에만 겨우 시간이 나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은 주로 사찰답사를 겸하고 있다. 

김재중 명인은 JTV의 전통창호 만들기 37년 외길인생 프로에 출연하기 시작하여, MBC라디오 행복한 라디오 캠페인, CBS라디오 열린마당 프로그램 등에서 널리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도 했다. 

 

-보기 드문 전통한옥문 짜는 사람

이제는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동료가 없다. 같이 시작했던 동료들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모두들 포기했기 때문이다. 희소가치가 있는 직업이라고 해도 그에 마땅한 대접은 없다. 창호는 사양길에 들어선 일이라 시대에 걸맞지 않는 직업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김 명인은 전북도내를 비롯해 전국에서 주문을 받는다. 사찰이나 향교 민속촌 등 전통한옥에 맞는 문을 짜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아서이다. 그는 주문을 받으면 직접 현장에 가서 측정하고 그에 맞는 무늬를 디자인 하는 등, 손수 작업을 한다. 이러한 작업은 어렵고 힘이 많이 든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그의 직업이 젊은이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업종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호일은 갈수록 그늘만 드리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김 명인은 자신이 직접 제작한 문들이 있는 사찰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큰 행복을 느낀다. 

“다 만들어진 후 완성작품을 보는 행복이 컸던 것 같습니다. 땀이 베인 완성작품을 보고 그 문이 유명사찰에 한 귀퉁이를 메울 수 있다는 것이 이 길을 계속 걸어온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접받지 못해도 쉬지 않았다.

창호는 1960년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당시 그는 경기전 근처에 있는 공업사로 들어가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5년간 그곳에서 기술을 배운 후에도 그는 연장하나 달랑 들고 또 다른 스승을 찾아가 또 다른 기법을 익혀나갔다. 그때는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꽤 많아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처음 창호를 접했을 때 그는 연장과 목재에 자신의 손이 닿는 순간 마치 그 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는 ‘내 길’을 찾은 것만 같아 평생 창호에 몸담을 것을 다짐했다. 

그가 자신의 공장을 비로소 가진 건 1979년이다. 그 때는 이미 10여년간 남 밑에서 열심히 배운 끝이었다. 그래서 공장은 특별한 자본 없이 달랑 연장하나 들고 차린 셈이었다.

“대접받는 직업이 못되지요.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죠. 그래도 한번도 쉬지 않고 해온 일이랍니다. 전통기법을 그대로 고수해 제 작품을 만드는 일에서 삶의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간 김 명인은 목수쟁이라고 불리면서 천대받는 직업으로 여겨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이 일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다. 

전라북도내는 물론 전국 유명사찰, 민속촌에 있는 문들 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전통기법을 그대로 고수해 창호제작을 한다. 

특히 꽃살문 기법이 그의 특기이다. 그러나 음지에 있다보니 빛을 보지 못했다. 주위사람들도 창호일을 잘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도 행복한 것은 문을 제작하는 순간에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일에 미친다는 것은 손가락 하나를 잃는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 일만을 고집하는 집념인 것이다. 

고집스럽게 외길인생을 살아온 전주 평화공업사 김재중 명인은 한평생 전주를 떠나지 않은 지역 토박이이기도 하다. 그가 작업하는 곳은 허름한 공장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길이 이어가야 할 자기 일에 대한 열정과 장인정신이 가득하다. 차가 수시로 비켜가는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동적골에 자리한 전통한옥문연구소(평화공업사)에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한국 최고의 창호 명인의 얼이 듬뿍 배어 있다. 

공장 내에 무질서하게 놓여진 나무토막들과 먼지를 일으키는 톱밥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 김 명인의 1평 남짓한 사무실이 있다. 이 곳에서 김재중 명인은 진안 마이산 탑사 대웅전, 송광사 지장전, 금산사, 선운사, 전주술박물관, 공예품전시관 등 전주한옥마을은 물론이거니와 용인민속촌, 롯데월드민속관 등 참으로 무수히 많은 일을 구상하고 성취해왔다.

“가장 감격스러운 일은 내소사 대웅보전의 빛모란 꽃살문을 전통기법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꽃 문양을 오려 붙이는 것이 아닌, 각 형태에 맞춰 나무를 깎아내고, 그 위에 꽃 문양을 조각하는 작업은 다른 어떤 일보다 긴장을 해야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드디어 김재중 명인은 우아하고 단아한 전통 창호와 문양을 제작하는데 전 과정을 오직 수작업으로만 진행하며, 특히 문화재분야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쳐 그 시대 본래의 원형을 보존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김 명인은 이동희-박병로-유양석-박종철-김재중에 이어 외사촌 김영철, 아들 김진석 씨로 이어지는 창호 제작의 계보에 빛을 더한 것이다.

“관람객들이 부주의나 실수로 전통문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 건물을 짓는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식의 문을 달아달라고 주문했을 때, 제멋대로 문을 다는 광경을 접하면서는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집의 얼굴은 바로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큰 집을 지어도 이에 걸맞는 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넥타이를 차고 한복을 입은 것처럼 어색할 것입니다. 집의 성격에 맞는 문을 달고 난 후 느끼는 희열감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고민고민해서 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한길만을 걸었다. 17살 때에는 전문기술 하나 배워 생계를 꾸려갈 생각만으로 창호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이 일이 천직이 되었다. 남들은 사양직업이라고 모두들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다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같은 직종에 몸담고 있는 동료들이 거의 없다. 창호는 김 명인이 그늘진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음지에서 묵묵히 50여년 가까이 단 한번도 손을 놓지 않고 해온 일이다. 

“과욕일지는 몰라도 작품을 선보일 전시관을 하나 갖고 싶습니다. 공장 2층을 수선해 그럴 계획을 갖고는 있지만 관계 당국에서 일부라도 지원해준다면 좀더 수월할 것입니다. 부디 저의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작업한다.

문을 만드는 나무는 홍송인데 수증기로 찌고 약 1년 이상 건조한 후 좋은 나무만을 골라 문을 제작한다.

먼저 문의 치수에 맞게 나무를 자른다. 그 다음에는 대패날을 맞추어 나무를 반듯하게 깎는다. 그러고 나서 치수와 문양에 따라 연필로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끌로 구멍을 파고 연귀 장부를 맞추기 위해 톱질을 한다. 그 후에 문살 한 쪽을 따낸다. 마지막으로 문살을 맞춘다.

한옥문은 나무를 자르고, 끼우고 하는 섬세한 작업이기에 거의 수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손을 많이 다친다. 김 명인의 손은 상처로 얼룩져 있다.

 

변산반도의 내소사 대웅보전.

‘금빛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법당 천장을 올려다보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이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 토막을 꿰맞춰 지었다는 대웅보전의 빛바랜 단청과 처마밑을 장식하는 정교한 조각은 이곳이 예사로운 사찰이 아니었음을 한눈에 짐작케 한다.

고풍스런 문창살은 장인들이 땀을 쏟아 하나하나 새겨 놓은 국화와 연꽃문양들이 화사한 꽃밭을 이루고 있다.

그곳에 가면 온통 꽃밭 천지다. 그 꽃은 그러나 땅에 피어난 게 아니다. 창호에 활짝 핀 꽃, 바로 문창살(문살)에 조각해 놓은 꽃이다. 그래서 영원히 시들 줄을 모른다. 이 곳을 찾는 손님들도 문창살의 꽃에 얼굴이 환해진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을까.’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 담백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꽃무늬 문살을 꽃살이라고 한다. 꽃으로 장식한 문창살을 이같이 부르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꽃살이 있는 문은 ‘꽃살문’이라 한다. 꽃살문은 현세에서 구현하려 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가 그윽한 미적 조형미와 어우러지면서 탄생한 불교예술작품이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우리나라 꽃살문 중 가장 빼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건물 정면 여덟짝의 창호엔 꽃무늬 문살로 가득하다. 문짝 하나하나가 그대로 꽃밭이고 꽃가마다.

사방연속무늬로 끝없이 이어진 꽃들은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오색 단청은 세월에 씻겨 내려갔고, 이제는 속살을 드러내 나무 빛깔, 나무결 그대로다.

담백하고 청아하며 깔끔하며 순박한 자연의 멋.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깊은 밤, 꽃살문에 붙은 창호지에서 배어나온다. 창호 틈새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들면 세속의 욕망은 소리 없이 흩어지고 금방이라도 해탈의 문이 열릴 듯하다.

꽃살문에는 수없이 깊은 무념무상의 경지가 숨어 있다. 꽃살문을 보면 그 옛날 이름 없는 목공의 섬세한 손끝 하나하나에도 지극한 불심과 예술혼이 깃들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문에 피어난 꽃살문은 그 경전 가운데서 가장 작고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듯하다.

법당 안과 밖을 이어주는 문을 소복하게 덮은 꽃살문의 그 꽃들은 무심하게 드나드는 모든 중생들을 염화미소로 맞고 또 보낸다.

부처의 극락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늘 미륵 불빛처럼 일렁이는 꽃, 즉 꽃살문이 놓여 있다. ‘묘법연화경’에서는 부처에 대한 최고의 경배 가운데 하나로 ‘꽃으로 장식하기’를 꼽았다. 꽃살문은 종교적 장엄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경전인 것이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빛모란 꽃살문, 선암사 원통전의 모란 꽃살문, 범어사 팔상전의 격자매화꽃살문, 용문사 대장전 윤장대의 솟을 꽃살문, 이 꽃살문들은 분명, 진리로 향하고 극락으로 이르고 깨달음으로 열리는 문 위에 화엄에서 캐온 꽃을 피워낸 듯하다. 

 

창호의 과거와 미래

소목일 중 한 분야인 창호(窓戶)는 창(窓)과 호(戶)의 복합어이다. 호는 문(門)과 의미가 다른 것으로 지게호(室口)이기 때문에 어떤 실에 드나들 수 있는 구조물을 말하며, 어떤 집에 드나들 수 있는 구조물인 문과 엄연히 구별된다. 또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한 짝으로 된 것이 ‘호’인데 이는, 밖으로 드나들게 된 구조물과 양짝으로 된 구조물인 ‘문’과도 구별된다. 

한국의 목조건축에서는 창과 호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어 쓰일 때가 많기 때문에 창호로 불린다. 창호 문의 구분도 애매하여 우리나라의 창호는 그 제작자를 일컫는 명칭에 따라 서로 구분하여 말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소목(小木)이 전담하여 짠 것은 창호이고, 대목(大木)이 제작한 것은 문으로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건축에 있어 창호는 아마도 견혈주거(堅穴住居)에서 발생했다고 추측되며, 나뭇가지와 풀로 엮어 만든 간이형 창호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호에 대한 기록으로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 나오기를 ‘흙집을 지었는데, 무덤모양과 같고 창호가 위에 있다’라고 한 데서 처음 볼 수 있다. 이후 기와집이 등장하면서 창호는 우리 선조들에게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안식처이자 집을 장식하는 공예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거북이 등 모양이 거북창, 잉어살, 매기살 등 물고기 모양에 따라 다양한 꽃살문, 그리고 한문 글자에 따라 완자창, 아자창, 격자창 수대창, 두꺼비집 불발기 창 등이 있다. 이렇게 창호는 자연과 환경에 따라 문양이 창작되었고 사회적 신분에 따라 품위를 표시하는 상징물로도 쓰였다. 

꽃살문은 조선불교미술 가운에 하나이다. 꽃살문은 경건한 불교 신앙심이 민중의 마음과 결합되면서 귀족적인 긴장감이 사라지고 소박하며 단순하고 따스한 정감이 서린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었다.

문살이 발달한 동양에서 우리의 꽃살문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중국의 문살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과 장식성이 풍부한데, 그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고 우선 놀라게 되지만 이내 곧 식상해지고 만다. 일본의 문살은 격자의 간결한 의장에 세련된 선미(禪味)를 담고 있지만, 예리하고 엄격하여 신경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의 꽃살문은 오래 접해도 물리지 않는, 담담하고도 편안한 느낌을 품고 있다. 물리지 않다는 것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무엇의 미적 장치가 그 속에 숨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란 긴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꽃살문은 긴장이 필요 없는 편안한 마음 가운데 미적 쾌감을 주는, 아주 독특한 미술품이다.

문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장치이다. 이쪽과 저쪽은 벽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 연결고리로 문이 있다. 그런데 저쪽에는 신성한 부처와 극락이 있고, 이쪽은 사바의 고통을 안고 사는 중생이 있다. 중생이 이승의 티끌을 털고 부처의 극락(極樂)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는 그러므로 지극한 환희가 넘쳐흐르는 곳이며 최상의 장엄으로 치장되어야 한다.

최상의 장엄은 언제나 그 소재가 꽃이었다. 석가모니께서는 영산(靈山)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했다. 이른바 염화시중에는 꽃(花)이 나온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꽃은 법(法)이요 부처(佛)요 진리(眞理)며 극락(極樂)이다. 그 꽃과 문이 결합된 사찰의 꽃살문에서는 조선사회 비주류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심성과 염원을 볼 수 있다.​ 

 


 

꽃살문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 춘향목으로 만드는 꽃살문

꽃살문의 나무 재질은 대부분 춘양목(春陽木)이다. 춘향목은 소나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궁궐, 사찰을 비롯하여 유명한 양반 가옥들 모두 이 춘향목을 사용하여 지어졌다. 또 가구재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이나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모두 춘양목으로 지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재질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소나무 수종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재질이 우수하고 값비싼 것이 춘양목이다. 춘양목은 재질이 단단하고 결이 부드러우며 붉은빛이다. 또 오래가도 썩지 않고 뒤틀리지 않는다. 일반 소나무들은 재질이 연하고 질긴 데 비해 춘양목은 재질이 강하면서도 연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향기 또한 대단하여 방안을 진동한다. 이런 장점들 때문에 목수들은 춘양목을 으뜸으로 치고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춘양목을 구해 집을 짓고 문을 짠다.


- 꽃살문 제작

꽃살문을 만들 때에는 백 년에서 삼백 년 가량 된 춘양목을 고른다. 그런데 한 나무에서도 북쪽을 보고 자란 쪽을 택한다. 그것은 이 부분의 나이테가 촘촘하기 때문인데, 나이테가 촘촘할수록 비바람을 맞아도 일정한 형태가 유지되어 문틀과 문살을 만드는 데 적절하다. 

 

이 나이테가 촘촘한 쪽으로 켠 나무는 또다시 북남풍이 부는 쪽에다 놓고 삼 년간 말린다. 이러한 작업은 기후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신축 작용에 충분히 적응시키기 위함이다. 잘 말린 나무는 사 년째 되는 해에 창고에 들여 보관하였다가 꽃살문을 만든다.

꽃살문을 만들 때는 살에 꽃장식을 조각하여 붙이는 조잡한 방법이 아닌 살과 한 송이 꽃장식을 일괄로 조각한다. 이러한 각 부분들을 조립해나가면 꽃살문이 하나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마지막으로 문살이 문틀 구멍에서 빠지지 않도록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고 대패로 밀어 매끈하게 마감한다.

꽃살문을 만드는 작업은 분업으로 이루어진다. 틀과 살을 만드는 작업, 꽃장식 조각과 단청 작업이 그것이다. 살에 장식을 조각하고 이어서 그것을 조립하고 마지막으로 문틀에 끼우기도 한다.


- 꽃살문 얼개의 종류

날살문은 문틀 안에 세로로 살을 지른 형태이다.

이런 종류의 문살은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문의 기능에 충실한 구조이다. 또한 이러한 날살 구조는 대부분 창문에 적용된다. 그래서 날살을 가진 절집 건물들을 보면 대체로 오래된 것들이 많다. 

띠살문은 날살문에 변화를 준 형태이다. 문틀에 상하로 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고, 좌우로는 상중하 세 단으로 나누어 가로살의 띠를 두른 것으로, 세로사란 두었을 때의 밋밋함을 가로살의 띠를 두어 보완하였다. 띠살문은 문살 가운데 장식을 절제한 담박한 모습이다.

띠살문은 우리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문이다. 면의 분할에서 오는 쾌적한 시각적 비례감은 띠살문이 갖는 최고의 예술성이다. 직사각형의 문틀에 길게 내리지른 세로살의 불편함과 피곤함에 세 단의 띠를 둘러 편안함과 쾌적함을 얻은 것이다. 방안에 앉아 빛에 비친 띠살문의 세 단의 띠를 보면서 우리 선조들은 천지인(天地人)의 질서와 조화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 문자에서 유래된 문

완(卍), 아(亞), 귀(貴), 용(用) 등의 글자 모양을 본떠서 만든 문도 있다. 이 가운데 완자문은 절에서 많이 쓰이고, 그 밖의 것들은 궁궐이나 일반 민가에서 흔히 보인다. 완자의 ‘卍’은 우리나라의 발음으로 ‘만’이지만 중국의 발음을 따라 ‘완’이라 불린다.

완자 무늬의 역사는 매우 오랜 것으로 석가모니불 이전부터 있어 왔고,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길상과 상서로움의 상징, 삼세(三世)의 시간과 시방(十方)의공간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바퀴 모양을 닮은 생김새에서 법륜(法輪)을 도식화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쩌면 우리 절에 사용된 완자는 이런 모든 것을 포괄한 불교 최고의 상징이기도 하다. 


- 격자살문과 빗살문

격자살문과 빗살문은 사찰 문 중 가장 일반적인 예들이다. 격자살문은 날살과 띠살을 같은 간격의 사각형으로 짠 것인데, 일명 정자(井字)살문 또는 우물살문이라고 한다. 빗살문은 날살과 띠살을 서로 어긋나게 겹쳐서 마름모꼴이 되도록 짠 문으로, 일명 교(交)살문이라고도 불린다. 격사살문은 띠살보다 간격을 촘촘히 함으로써 구조상 튼튼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빗살문은 격자살문을 모로 뉘어 배치한 것으로서, 단조롭고 규칙적인 격자살문에 변화를 준 장점이 있다.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오래 전부터 격자살문과 빗살문이 법당에 사용되었다.

격자나 빗살문은 정확한 간격으로 얽혀있어서 튼튼하고 견고하다. 따라서 그것이 주는 이미지도 다른 꽃살문에 비해 단정하고 강고하다. 

 

- 숫대살문

살문은 띠살과 격자살, 빗살을 기본으로 해서 다양한 변형이 발생한다. 격자살과 빗살을 혼용한 격자빗살문(솟을살문)이 있고, 사각형을 상하좌우로 서로 잇대 배열한 숫대살문이 있는가 하면, 사각형 틀의 크기를 키워 살을 드물게 넣음으로써 간편하고 검소한 분위기를 내는 범살문이 있다. 또 거북등 모양의 귀갑무늬살문, 널판을 그래도 짠 널문이 있는가 하면, 대나무와 싸리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대쪽겨룬살문과 싸리엮은살문은 아주 기초적이고 소박한 짜임새의 문에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개폐 방법, 위치와 용도, 구조와 기능, 면 구성재, 형태 등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문이 있다.

숫대살문은 위에 열거한 문 가운데 절집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데, 주로 요사채나 승방에 사용되고 있으며, 그 변형인 범살문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전통건축에 자주 사용된 숫대살문은 띠살문과 함께 오랫동안 우리 생활과 친숙하여 정서적으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이다. 격자살이나 빗살문만큼 견고하지는 않지만 사각형의 조합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변화의 모습에서 미묘한 운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점에서 뛰어나다.

숫대살문의 사각형은 대부분 직사각형이다. 그것은 상하좌우로 연결되면서 불규칙한 공간 분할을 이루고, 간간이 등장하는 정사각형만이 변화를 자극한다. 공간이 분할되면서 생긴 부분들은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이지만 모두 사각형이기 때문에 단순하다. 살의 일정한 굵기에 의한 사각형의 나열이란 점에서 기본적으로 단순성을 지향하지만, 무질서한 듯이 배열된 사각형 공간 때문에 복잡성이 더불어 담겨진다. 그러나 그같은 배열에 일정한 규칙이 있음을 어렵지않게 읽어낼 수 있으므로 시각적으로 전체적인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다. 한마디로 아주 단순한 도형이면서도 약간의 변화를 도입함으로써 수준높은 미적 쾌감을 추구한 것이다.

 

-숫을살문(격자빗살문)

격자빗살문은 격자살과 빗살을 주로하여 여러 살을 혼용한 것인데, 일명 솟을살문이라고도 한다. 솟을살이란 솟아 도드라진 것이라는 의미로, 거기에는 대부분 도드라지게 꽃을 새겼다. 솟을살문은 여러 살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히 복잡한 형태를 보이는데, 거기에 꽃을 새겨 넣은 경우에는 매우 화려한 모습의 꽃살문이 된다.

우리의 창호문화는 분명 건물의 바깥 모습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지만 방안에서 창호지를 통해 바라보는 경우를 또한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숫대살문에 형성된 사각형의 조합은 창호지를 통해 그림자로 나타났을 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숫대살문에 비친 바깥 풍경은 흑백 대비이다. 흰 창호지가 담아내는 사각형 살의 윤곽은 검정이다. 휘영청 달 밝은 발이라도 되면 그 흑백 대비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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