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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고수환
  • 종사분야
  • 악기장 / 가야금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 지정날짜
  • 1998.01.09
  • 주소
  • 전주시 덕진구 호반2길 10
  • 이메일
  • kosuwhan@naqver.com
  • 기타
무형문화재 소개

고수환 악기장은 1949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명인들의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에 밀려 기술을 배운 것과는 달리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야금 소리에 매료돼 가야금 공장에 취직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가야금 만드는 일이 즐거웠고,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꼈다. 가야금을 알아야 가야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간 날 때마다 가야금 명
인들을 찾아가 악기를 배우고 이야기를 나눴다.


고수환 명인은 악기 제작 기술에 있어 정통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의 기술은 악기 제조 분야의 최초의 무형문화재인 김광주 선생을 시작으로 조정환-조정삼·남갑진-고수환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20대 후
반 현재 무형문화재인 이영수 명인에게서 악기제작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3대가 물려가며 사용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야금과 거문고, 해금, 양금 등 현악기를 만든다. 특히 그의 가야
금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맑은 음색으로 유명한 명품으로 가야금 병창 강정열 명인과 안숙선 명인 등 대가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03년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가요인 ‘공무도하가’에 등장하는 전설의 악기 공후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1960년대 국립국악원에서 공후의 형태를 복원한 적은 있지만, 실용화를 위해 악기와 연주법까지 되살린 것은 그가 처음이어서 더욱더 화제가 됐다.


·1949년 정읍 출생
·1991년 스페인 트레드클럽 세계악기품평회 금상 수상
·1998년 무형문화재 악기장 가야금 보유자 지정
·2003년 전설의 악기 공후 복원 성공
·현재 전주국악기 운영, 전라북도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장​ 

라이프스토리

 

악기장(가야금)으로 지정되다.
악기장이란 장구, 북, 단소, 가야금, 거문고 등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가야금은 한국 고유의 대표적인 현악기의 하나이다. 옛 문헌의 한글표기는 ‘가얏고’이며, 아악 또는 정악에서 사용되는 것은 ‘법금’ 또는 ‘풍류가야금’이라 한다. 
가야금은 좁고 긴 장방형의 오동나무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꼰 12개의 줄을 걸고, 줄마다 그 줄을 받치면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안족(雁足)을 세워 놓았다. 음색은 맑고 우아하며, 연주기교가 다양하여 아악과 민속악에 두루 사용된다.
한국의 악기제작은 전주와 정읍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이유는 비교적 여유롭고 산수가 좋아 자연풍류가 성행함으로써 이 지역이 악기제작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악기장 고수환 씨는 김명칠, 김붕기 등 당대를 대표했던 악기장의 맥을 원형대로 이어오고 있는 인물로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야금을 비롯한 현악기 제작에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가야금 제작의 외길 인생
가야금 악기장 고수환 명인은 가야금 만드는 일에 한평생을 바쳐온 사람이다. 그는 가야금의 12줄 소리에 매료돼 가야금 제작의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40년이 넘게 가야금 줄을 다듬어 온 그는 이제 소리만 들어도 제대로 만들어진 악기인지 나쁜 악기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의 세월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70, 80평생 한길을 걸어온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길지만은 않은 이 기간동안 고수환 명인은 끊임없이 제대로 된 가야금 찾기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 전북 최초의 가야금 제작 명인

고수환 명인이 만든 악기들은 음이 맑고 청아하다. 고 명인이 만든 가야금줄을 퉁기면 은은하게 퍼지는 소리가 깊고 그윽하여 전국 각지의 연주자들이 그를 즐겨 찾는다. 

“가야금은 외형보다는 공명통 안에서 소리가 잘 울려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무의 강도에 따라 판의 두께도 조절해야지요. 줄의 굵기도 좋은 소리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견고성과 소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모양이 아무리 좋아도 튼튼하지 않고 소리가 둔탁한 것은 실패작이죠.” 

이런 까닭에 3,4년만 배우고 독립하다시피 떠나는 젊은 후배들이 그는 안타깝다.

“저는 얼마 전에야 좋은 소리 내는 원리를 깨달았어요. 나무재질에 따라 앞뒷판 두께를 제대로 조절해야 했는데, 그걸 몰랐죠. 스승들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스승들의 어깨 너머로 가야금 제작을 배웠던 고 명인이 어렵사리 명기(名器) 제작의 비밀을 알아냈을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원리를 깨닫기 이전에는 사실 모방수준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까지 털어놓는 고 명인은 그러나 실은 좋은 소리를 구별하기 위해 가야금 명인 동국대 황병주 교수로부터 연주법을 사사 받아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다. 

“제가 연주자라는 생각으로 악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러한 고수환 명인의 장인정신이 높게 평가돼 그는 전북무형문화재 가야금 악기장으로 등재됐다. 전라북도 내에서 악기장으로는 네 번째, 가야금 명인은 처음이다. 전국에서는 그의 스승인 이영수 씨 등 2명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시도 지정무형문화재로는 광주에 딱 한 사람이 있다.

고수환 명인이 가야금 제작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남다른 손재주가 인연이 됐다. 이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사돈 조정삼 씨가 그의 나이 15세 때 가야금 제작을 권유했다.

이때 무형문화재였던 김광주 씨의 제자 완주 초포사람 남갑진 씨가 가야금 제작을 함께 했다. 이후 고 명인은 25살 되던 해까지 조씨의 문하에서 함께 일하다가 현(現) 국가무형문화재인 이영수 선생 밑에서 29세 때까지 4년간을 배웠다. 남씨는 한국 가야금 명인 고(故) 김명칠 계보였고, 이씨 역시 또 한줄기의 명인 계보를 이뤘던 고 김붕기의 제자였는데, 이 두 사람에게서 가야금 제작을 전수받은 까닭에 고 명인은 목재의 마름질에서부터 줄꼬기 등 악기제작공정 전과정을 옛 원형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야금 한대 만드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어림잡아 한 달이다. 잘해야 한달에 10여개정도의 가야금을 만들지만 연주용으로 맘에 꼬옥 드는 것은 3개 정도라고 말하는 고 명인은 전북도립국악원이 추진 중인 악기 개량작업도 맡아 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12줄을 15줄, 17줄, 22줄로 늘려 음폭을 확대시키는 일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음악과 악기도 새로워져야겠죠. 전통악기는 전통 그대로 보존하되, 악기개량은 다양한 음악을 담아내기 위해 과감히 추진돼야 합니다. 이 작업은 저희들 몫이죠.”

전북의 정읍과 전주는 예부터 한국악기 제작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예맥은 현악기 제작의 거두 김붕기 선생 등을 이어 태인 출신 고수환 명인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고수환 명인의 주요 경력은 1979년 전국관광민예품 경진대회 특선, 전북산업디자인전 특선에 이어, 1980년 전북산업디자인전 우수상, 1984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우수상, 1991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은상, 전국공예품경진대회 입선, 스페인 트레드클럽 세계악기품평회 골드 트로피를 수상한 바 있다.​

 

 

- 고대 동양 현악기, 공후를 제작하다.

몇 해 전, 전남 광주 신창동 유적지에서 원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현악기와 이 악기를 연주하는 토우(土偶)가 출토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가야금의 원형격인 이 현악기의 발굴은 지금까지 가야금과 관련된 공식기록, 즉 가야인 악사(樂士) 우륵의 연주보다 훨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가야금 제작이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이 그예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임이여, 이 일을 어찌할꼬”

(公無渡河 公竟渡下 墮河而死 當奈公何) 

문헌상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정 가요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 전주에서 되살아나 구슬픈 공후의 선율로 연주되었다. 

고대 동양의 현악기인 공후는 서양의 하프와 비슷하며, 틀 모양에 따라 와공후(臥: 13현), 수공후(竪: 21현), 대공후(大: 23현), 소공후(小: 13현)로 나눈다. 고대 이집트, 유대, 그리스 등지에서 유행하던 공후 모양의 악기가 페르시아, 인도에 전해지고 다시 동서로 전파되었는데, 중국으로 전해진 것은 수공후,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하프가 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공후는 고구려 때부터 사용했으나 그 후에는 사용한 기록이 없어 어떤 음악에 쓰였는지 알 수 없다.

고수환 명인은 전통음악에 쓰이는 옛악기를 꾸준히 연구하며 그 활용을 넓혀왔다. 그런 그의 손에서 고대 동양의 현악기 ‘공후’가 다시 태어났다.

“무형의 악기를 되살렸다는데 큰 의미가 있지요. 번번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연구가와 연주자들이 모두 만족하는 듯 해서 기쁩니다.”

그의 공후 제작은 창사특집 방송으로 공후재현을 기획한 전주문화방송 윤승희PD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그때부터 시작된 고수환 명인의 고민은 공후의 형태적 재현 못지않게 ‘최고의 음색’을 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공후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어 있는 공후는 1937년 중국 베이징에서 사들인 것이어서, 국내 유일한 자료는 강원도 상원사 범종(725년, 신라)에 부조돼 있는 공후 연주모습 뿐이었다. 일본 정창원(왕실의 보물을 모아 놓은 창고)에는 백제에서 전했다는 공후로 추정되는 ‘백제금’이 있지만 이마저도 일년에 한 차례 공개될 뿐이었다. 문헌상 기록도 중국 ‘수서(隋書)’에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의 일부에서 공후가 쓰였다’는 정도였다.

“공후는 윗기둥이 굽은 P자 모양의 틀레 23가닥의 줄을 건 악기인데, 공명통이 굽어진 기둥 위부터 아래로 이어지고, 공명통에 연결된 하주(下柱: 아래쪽에 삐어져 나온 부분)를 받침대에 꽂고 양손으로 연주하도록 했지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전해지는 연주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십수 년 전에 전통악기 연구가들이 공후를 만들어낸 일화가 있지만, 모양만 흉내 냈을 뿐 소리내기에 실패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악기는 소리가 생명 아닙니까. 악기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쓰임새에 맞게 꾸며지지요.”

현재 고수환 명인의 작업은 모든 현이 제 음을 낼 수 있는 것까지 성공한 상태이다. 세세한 악기 모양과 색칠 등은 좀 더 연구를 통해 보강해야 한단다.

또 한 가지 과제는 하프처럼 안고 연주하는 악기여서 가벼워야 하고, 인체의 구조와도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통은 실한 오동나무를 이용했고 길이가 다른 현 23줄은 다른 악기의 특성을 본떴다.

고 명인은 수족처럼 아끼던 오동나무를 사용했지만,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오동나무의 무른 특성이 장력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작기간 중 처음 만들었던 악기는 시범 연주도중 현이 끊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30년 이상 고생하면서 자란 재래종 오동나무를 다섯 겹으로 붙여 공명통인 악기 기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력이 생기게 되더라구요.”

현 23줄도 처음엔 자연섬유를 사용했지만 썩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쇠줄을 쓰는 양금을 떠올려 높은 음은 강한 철사를 꼬아 만들었고, 중저음은 중국악기인 ‘쟁’의 악기 줄을 활용하여 가는 철심을 사용했다.

“전통악기의 세계화를 생각해서 3옥타브까지 다양한 음역을 표현할 수 있는, 현이 23개인 공후 제작을 생각했습니다. 25현을 연주하는 사람이나 피아노를 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을 겁니다.”

고 명인이 만든 공후는 중국의 ‘쟁’과 우리의 전통악기인 ‘양금’의 현을 합쳐 만든 23줄의 현악기로 한국적인 곡선미가 돋보이는 공명통과 소리를 조율할 수 있는 조음대, 전통 버선 모양을 형상화한 받침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형은 조선시대의 음악책인 ‘악학궤범’에 나오는 것을 참고했으며, 전북대 조석연(한국음악과) 교수가 고증을 맡았다.

1년 가까이 걸려 공후를 만든 고수환 명인은 작업과정 중 소리 울림을 극대화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명주실이나 나일론 줄 등을 사용했지만 잘 끊어지고 소리마저 작았기 때문이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울림판을 통해 소리를 내는 가야금의 원리를 채택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령이 30년 이상 된 오동나무를 얇게 잘라 붙인 지주대 겸 공명통을 달자 3옥타브의 음역을 소화하면서도 영롱하고 깔끔한 소리가 울려 나왔어요.”

고 명인이 만든 공후는 독주는 물론 협연을 위한 악기로도 좋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손가락으로 꺾거나 튀기는 가야금과 달리 기교가 필요 없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어 곧바로 대중화할 수 있는 악기로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껏 투명해진 공후의 선율은 전주문화방송 라디오 창사특집 ‘악기는 사라지며 제 소리를 낸다, 잊혀진 악기 공후를 찾아서’(연출: 윤승희/작가: 김주선) 편에서 이화동 교수(전북대 한국음악과)가 직접 작곡한 작품과 연주로 들을 수 있었다. 이 방송은 명인의 숨결과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제작진의 의지가 함께 실린 시간이 되었다.

공후는 1960년대에 국립국악원에서 형태만을 복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실용화를 위해 악기뿐 아니라 연주법까지 되살리기는 고수환 명인이 처음이다. 


- 가야금 소리에 반하다.

손재주를 타고 난 고 명인은 가야금의 오묘한 소리에 반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국악기 제작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음력 1949년 9월 9일 정읍군 태인면 출생이다. 그의 어린시절은 4남 3녀 중 막내여서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는 정읍에 있는 태인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16살까지 아버지 밑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의사나 한약사를 권유해서 서당에서 주로 천자문, 삼천자문, 추구, 사자소학, 계몽편, 동몽선습, 명심보감, 통감 등 한문공부를 시켰다.

고 명인은 6.25직후에 구두를 신고 가죽 가방을 매고 학교를 다닐 정도로 집안이 유복했고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기에 동네의 부고장, 입춘대길 등을 집집마다 써주기도 했다.

고 명인은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가 나무를 잘라 새총, 권총 등을 만들면 유난히 돋보였다. 어느 날인가는 거북선을 만들어 놓기도 했는데 그의 솜씨에 어른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 친척 중 한 분이 가야금을 만들고 있었고 고 명인은 그 가야금 소리에 매료되어 갔다.

고 명인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황방산 뒤편에 있는 가야금 공장에 취직을 했다. 당시 총각이었던 조정삼, 남갑진 씨와 같이 일하면서 고 명인은 시내버스가 하루에 2번 정도 다니는 이 곳에서 가야금을 만들었다. 당시는 볏단을 훔쳐서 초가를 잇고 쌀을 빌려다 먹어야 하는 가난한 집에서 가야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때 고 명인의 나이는 19세였다.

19세 때부터 고 명인은 외할머니와 어머니, 형, 조카를 부양했다.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어서 평생 동안 어머니 한 분을 의지해서 살았다. 외삼촌은 보국대에 끌려가서 돌아가셨다.

전주에 있는 사람들이 고 명인의 솜씨를 보고 서울 김광주 가야금 제작자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고 명인은 배신을 하는 것 같아서 가지 못했다.

1968년에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고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문구가 나오면서 가야금이 잘 팔리기 시작했다. 동업했던 세 사람은 각기 흩어져 서울과 전주 공장에서 일했다. 열흘씩 일해주고 만 5천원씩 4만 5천원이 월수입이었다.

24세 때는 군에 입대했다. 고 명인은 한자를 잘 알고 잘 썼기 때문에 군에서 행정을 보았다. 11시까지 군대 일하고 새벽 2시까지 독학으로 공부를 하던 고 명인은 군에 있을 때도 휴가를 나오기만 하면 가야금 공장에서 일을 해 주었다.

제대할 때의 나이는 27세 였다. 고 명인은 제대하고 서울에 조금 있다가 전주로 내려왔다. 1976년 10월에는 독립해서 가야금 제조를 내 사업으로 삼았다.

1977년 29살 때는 당시 26세인 정복희 여사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전주신혼예식장에서 올렸다. 당시는 내 집이 없어서인지, 고 명인은 산 밑에 있는 찌그러진 남의 집도 부러워했고 남의 집 화장실도 부러워했다. 30살이 되어서야 서학동에 살림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고 명인은 그토록 부러워하던 일을 성취한 것이었다.

고 명인은 아들 셋을 두고 있다. 큰 아들은 원광대 국악과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피리를 전공한다. 둘째 아들은 원광대 물리반도체학과에 다니다가 3학년 때 휴학계를 내고 캐논 물류센터에 취직을 했다. 셋째 아들은 4학년 때 정읍시립 국악단에 아쟁으로 취직을 했다. 현재 아내는 금암동 교보생명 건너편에 있는 전주 국악기라는 악기사를 운영한다. 이렇듯 고 명인은 자식들이 피리와 아쟁 등을 전공하는 국악가족이기도 하다. 가훈은 건강, 화목, 저축이다.

1975년에는 신문지상과 TV에 가야금계 최초로 출연했고 전북 산업디자인전에 악기를 출품하여 특선을 하기도 했다. 서울 전국대회에서는 우수상을 받았다. 고 명인은 시사주간지, 서울 TBC 등에도 출연한 바 있고 그 외 MBC, KBS, JTV 등에 수회에 방송되었던 유명인사이다. ​


 

 

가야금의 과거와 미래

시대가 변하면 음악도 변한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서가 달라지면 음악도 자연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우리 앞에 놓여지는 음악의 변화양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컴퓨터와 통신을 통해 같은 시간에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만나는 시대적 분위기는 우리 음악에도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국악기 개량사업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부각된 과제이다. 국악의 생활화와 세계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민족음악의 창출과 국악기 개량이 가장 시급한 작업으로 떠오른 것이다.

전북도립국악원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악기개량사업은 여러 차례 시도되었고 결실을 맺어왔다. 1995년 8월에 시작된 악기 개량사업은 그동안 기초조사와 분야별 용역, 중국 연변의 악기개량작업 시찰을 가진데 이어 당시까지의 연구 성과를 응용, 악기제작에 들어가 1996년 6월 시연회를 가진 바 있다. 

국악기 개량작업은 1960년대부터 국립국악원의 주도로 진행되어 왔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실험적인 작업 차원에 놓여있다. 이를테면 많은 연구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수많은 개량악기가 제작되었지만 실용화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성과를 두고 음악계에서는 실험적인 연구 작업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그 성과물로 제작되어진 수십 종의 악기가 사장되는 허실을 가져왔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1996년 10월 국립 국악원이 예악당 개관 기념으로 마련했던 개량국악기전에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분야의 각종 악기들이 수십 종 전시되어 관심을 모았지만 그 악기들이 실제로 활용되기에는 많은 한계가 드러나 아쉬움을 주었다. 30년이 넘게 이어져온 국악기 개량 사업이 결국은 탁상 연구 작업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에 투자되었을 예산과 시간, 그리고 연구진의 노력은 아무튼 우리 음악 악기의 생활화나 세계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전통음악을 연주하기에는 전통악기가 적합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창작곡들을 수용하고 또한 앞으로 더욱 새롭게 요구되는 음악적 정서에 부합되는 연주가 요구되는 현재로서는 국악기 개량사업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도립국악원이 새로운 의욕으로 시작한 악기 개량사업에는 각별한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관련연구자들의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다.

도립 국악원의 악기개량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곳은 연구단이다. 1995년 8월 구성된 악기개량사업단에는 연구단 자체에서는 유장영 연구원이 참여하고 있으며 연주단의 상임지휘를 맡고 있는 최상화 교수와 우석대 국악과 윤명원 교수, 악기제작자인 고수환 씨가 참여했다. 

예산은 4천 5백만원이었다. 기초조사부터 악기제작, 그리고 시연회까지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이 작업에 참여한 대부분의 연구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노력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흔쾌히 동의했다.

 

이들은 기초조사와 분야별 연구용역을 거쳐 개량악기로 가야금과 해금을 선택했다.

이번 작업의 개량내용은 전기음에 의한 음량의 증폭, 국악기의 음량 증폭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실제 악기 제작 실험에서는 전기음 증폭을 택했다.

현재 제작중인 개량악기는 가야금과 해금 등 두 종류에 지나지 않지만 실제로 만들어지는 악기는 15종 정도에 이른다. 악기 개량이란 악기가 각각 부문별 특징을 갖추어 새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전기음 증폭에 의한 가야금과 해금은 전통악기가 지닐 수 없는 음량과 음폭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 전통음악은 사랑방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연주가 공연장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악기는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음역의 확대나 음량의 증폭은 국악기가 해야 할 눈앞의 과제입니다.”

유장영 연구원은 성공적인 악기개량을 위해서 좋은 설계사와 제작사, 악기에 맞는 곡을 만드는 작곡가와 연주가가 있어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본다면 도립국악원은 국악기 개량사업을 실질적으로 추진해 갈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1995년 말 악기개량이 정착된 중국 연변대학을 방문하여 다양한 정보 교환을 나누고 교류 작업의 틀을 마련한 악기개량사업단은 연변대한 악기제조청 청장을 초청, 기술적인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도 했다. 전통국악의 본고장인 전북이 우리음악의 세계화를 향한 보다 실질적인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전북도립국악원은 국악기 개량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 만에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량 국악기의 대중화는 여전히 멀리 있지만 적어도 국악 관현악 연주에 있어서 기존 현악기가 지닌 음량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어냈다.

당시 유종근지사의 국악기개량에 대한 적극적인 시책 지시로 시작되었던 전북도립국악원의 악기개량사업의 성과는 무엇보다도 자연음 그대로의 음향적 울림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악기 개량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훨씬 강한 국악계 풍토에서, 전통적인 악기의 외형을 최대한 손상하지 않는 범위로 한정시키면서도 효과적인 음량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술 개발은 주목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중소형 공연장에서 자연음으로 연주가 가능하도록 음량을 증대시킨 점이나 음역을 확대하고 기존의 악기 장점을 최대한 살려낸 것은 앞으로 개량악기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바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 돋보이는 성과는 자연음 개선에만 있지 않다. 전기음에 의한 증폭 역시 상당한 의미를 전한다. 전자음에 의한 개량악기는 5백석 이상의 대형공연장, 서양악기와의 합주, 사물놀이 등과의 협연, 그리고 곧 다가올 전자음악시대에 그 활용도와 가치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들이 실용성과 연계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실제 연주에 활용하기까지에는 해결해야할 난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도립국악원의 개량사업 결과 보고회 토론에서도 다양하게 지적되었다.

한 연구자는 “개량국악기는 음량을 높이는 목적이 크다. 그러나 연주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움직이거나 가야금과 무릎의 마찰음이 크게 전달되는 단점이 있는 듯 하다. 또 줄과 안족이 벌어지고 손상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연구자는 “국립국악원에서도 오랫동안 전통악기의 개량작업을 해왔지만 여러 가지 수반되는 문제가 적지 않다”며 개량에 앞서 알맞은 음향시설을 갖춘 공연장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개량악기인 24현이나 12현 가야금은 거의 서양화된 소리라는 부정적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또 일부에서는 자연음의 증폭이라고는 해도 자연음 그대로를 반영하는데 차이가 있다며 기계적인 음색이 아니라 자연음을 살릴 수 있는 방법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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