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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도시 전주
최온순 침선장은 1937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유난히 바느질을 좋아했던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이리문화양재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스물두 살이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됐고, 이후 열여섯 명이 나 되는 대가족의 의복과 생활용품을 책임지기 위해 시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다. 점차 솜씨를 인 정받게 된 그는 옷감을 받고 주변 사람들의 옷을 만들게 됐고 어느새 바느질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 우연한 기회에 익산 노라노양재학원에서 한복을 가르치게 된 그는 처음 출전한 기능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환갑이 되던 해인 1997년 40여 년간 해온 바느질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요람에서 무덤까 지 서민 옷을 중심으로·최온순 전통복식전’을 열고 일반인들의 생활복식을 조명해 화제가 됐다. 전시 를 계기로 박경자 성신여대 교수와 박성실 단국대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그는 한국복식사, 출토 복식의 유물 복원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며 작품세계를 넓혀갔다.
이후 조선시대 다양한 옷을 복원하는 데 전념해 온 그는 전라도 지방의 굴건제복(屈巾祭服)을 복원· 재현해 내며 199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정경부인 은진 송씨 당의, 덕온 공주 당의 유물 녹원삼 등 전통복식을 재현하며 전통침선의 맥을 이어온 그는 2014년 말 태조 이성계의 청룡포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1937년 군산 출생
·1998년 무형문화재 침선장 지정, ‘전라도 장인 33인’ 선정, 한복의상 공모대전 금상, 국가기술자격 증 한복기능사 취득
·2000년 ‘누가 한국 패션을 움직이는가?’ 38인 선정
·2002년 단국대 부설 사회교육원 전통복식과정 수료 및 출토복식 제작 자격증 취득
·2011년 전주시민의장 문화장
·2014년 태조 이성계 청룡포 복원
침선장으로 지정되다.
여천 최온순 명인은 1998년 11월 27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22호 침선장으로 지정되었다. 그 공적은 수의(壽衣)와 굴건제복(屈巾祭服)의 복원 재현이다.
최온순 명인은 수의와 굴건 제목의 자료를 찾는 데 많은 고생을 했다. 수의는 서울에 사는 박경자 교수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했으나 전라도 지방의 굴건제복에 관해서는 배울 길이 없어서 막막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최 명인은 여러 박물관을 둘러보기로 작정을 하고 온양민속박물관을 비롯하여 광주민속박물관과 안동민속박물관 등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박물관은 소장품을 진열장 안에 넣어 두니, 옷을 앞 뒤로 잘 살펴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상복(굴건제복)은 그 상복을 입은 상주가 죄인이라 하여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더더욱 그 바느질 기법이니, 치수, 깃 모양 등을 살펴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상복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차에 안동민속박물관의 이상일 학예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상일 학예사는 상지전문대학교 복식 교수가 굴건제복에 대한 도면을 그린 적이 있다고 하면서 도면 한 장을 건네 주었다. 최 명인은 그 도면을 받아들고 그대로 천을 끊어서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아서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분이 익산시 웅포면의 산골마을에 가면 굴건제복을 잘 만드는 할머니가 계시다고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곧장 그 할머니를 찾아간 최 명인은 ‘아 이렇게 혀, 요렇게 허면 돼야, 이렇게 혔다니까’로 일관하는 할머니의 주먹구구식 설명에 큰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다시 갈등과 고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친구가 말하기를, 군산시 성산면에 가면 노웅렬 옹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당시 5,6년 전에도 만든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최 명인은 남편과 함께 무더운 여름철임에도 불구하고 물어 물어 노웅렬 옹을 찾아갔다. 노웅렬 옹은 평소에 근동에서 상을 당한 집이 있으면 불려 다니면서 상복을 만들어 주던 분이었다. 최 명인은 그 어른 한테서 자료 몇 가지와 상복의 깃을 어떻게 다는 지 등의 방법을 배웠다. 일단 종이로 상복을 완전하게 만든 다음 최 명인은 서울에 있는 박경자 교수의 고증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 지방의 굴건제복이 복원된 것이다.
최 명인은 이렇게 잊혀져가는 수의와 굴건제복의 복원 재현을 어렵사리 해냈고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재 침선장으로 지정된 것이다.
최온순 명인은 한복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했고, 단국대 부설 사회교육원에서 출토복식제작자격증을, 전통복식과정을 수료하면서는 자격인증서를 취득했다. 이후 최 명인은 풍남제전 전통복식초청전을 비롯하여 10회의 회원전을 가졌고, 기능 보유자 무형문화재 공개발표만도 7회나 참여했고, 한복 의상 공모대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외에도 4회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최 명인은 기능교육 및 전문교육 강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전주동암종합복지회관, 전주대문화관광학부, 기전여대 사회교육원에서 시간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전라북도 장애인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으로 5차례나 위촉되었고 심사장만도 2회나 위촉되었다. 또 전라북도 지방기능경기대회 한복부 심사위원에도 4회, 심사장 2회의 위촉을 받은 바 있다.
최온순 명장의 대표작은 정경부인 은진 송씨(영의정 정응두 부인) 당의 재현(단국대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소장), 덕온 공주(조선조 순조의 3녀) 당의 유물 녹원삼 재현(단국대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소장)을 비롯하여 회장 저고리, 붉은 치마, 사규삼 등이다.
바느질이 좋기만 했던 소녀시절
최온순 명인은 1937년생(실연령은 1936년생이나, 호적이 한해 늦게 되어 있다)으로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중전부락에서 탐진 최씨 종손인 아버지 최선유씨와 어머니 고영인 씨 사이에서 9남매 중 여덟째딸로 태어났으며 밑으로는 남동생 한 명을 두고 있다.
어머니와 언니들이 모두들 침선에는 타고난 재주와 솜씨가 있어 최온순 명인 역시 어렸을 적부터 바느질을 보고 느끼며 자랐다고 한다. 당시는 특별히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한국의 여성이면 으레이 집안에서 바느질을 했던 시절이었다. 최온순 명인은 유난히도 바느질을 좋아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헝겊만 보면 무엇인가를 꿰매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단다. 어른들께서는 헝겊만 버린다고 나무라셨지만 최 명인은 몰래몰래 숨어서 네모진 주머니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주기도 하고 자기 치마끈에 달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차츰 욕심이 생겨서 옷을 만들어 볼 생각을 하여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으로 자신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최 명인의 나이 13살 때였다. 헌 천(광목)으로 저고리를 만들어 입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이 모두들 어찌나 부러워 하던지 어깨가 으쓱해졌었단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어머니들도 나를 앞뒤로 돌려 보면서 ‘온순이는 제가 제 옷을 해 입었네’ 하시면서 얼마나 칭찬을 했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가족들도 칭찬을 많이 해주었다. 지금도 그 옛시절이 가끔 생각난다고 말하는 최 명인은 일찍부터 눈썰미와 손재주를 인정받고 그 때부터 바느질을 즐겁게 시작한 것이라면서 흐뭇해 한다.
최온순 명인의 소녀시절은 6.25전쟁 직후라서 가난과 고통의 시절이었단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고민 끝에 바느질이나 배워야지 하고 찾아가 입학한 곳이 이리문화양재고등학원이었으나 통학에는 어려움이 많았었다고 전한다. 전쟁으로 이리역이 폭파 된 후라 열차가 제대로 다니지 않아서 임피역에서부터 이리까지 약 20여리나 되는 곳을 날마다 통학하기란 보통 힘든게 아니었다. 새벽에 일찍 나서서 걸어가야 했고 창고 같은 학원에서 찬밥덩이 도시락을 까먹고 공부하다가 해질 무렵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다시 걸어서 집에 돌아와야만 했던 고달픈 배움의 길이었다 이렇게 하여 어렵게 예과와 본과의 과정을 졸업하였으나 바느질 할 곳도, 돈을 벌 수 있는 곳도 없었기에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원생들 양복만드는 일을 도와주고 지냈으나 이도 여의치 않아 한동안 집에서 쉬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침선 수업
최온순 명인이 침선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최 명인이 나이 22살 때인 결혼 후부터라고 한다. 결혼 전에는 친정 어머니로부터 바느질을 배워 가족들 옷이며 자신의 농지기감을 직접 만들기도 했으나 22살 되던 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어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진주 김씨댁 셋째며느리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시집을 가서 보니 최 명인 앞엔 14명의 대가족이라는 짐이 놓여 있었다. 시부모님을 비롯하여 시아주버니네 식구, 시누이와 일꾼들...1년간의 시집생활은 최 명인에게 고생은 됐지만 식구들의 옷 뒷바라지와 시누이들의 ‘농지기(시집 가는 처녀가 준비하는 혼수품) 만드는 데 혼신을 다했던 시기였다. 버선과 베개, 이부자리며 나들이옷에 이르기까지 한두 벌도 아니고 한죽(열벌)씩 준비해야 할 때였으니 최 명인의 고생은 족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게다가 14식구나 되는 대식구의 음식수발까지 해야 했으니 새색시 시집살이는 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고 바늘과 실이 놓여날 날이 없었다고 조심스럽게 전한다.
시어머니 전순길 여사의 솜씨는 인근에선 ‘최고’로 꼽혔고 ‘손맛’ 또한 매섭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시어머니께서는 무명, 모시, 삼베, 명주 등 길쌈에도 능하셨다고 한다. 그런 시어머니로부터 바느질 사랑을 듬뿍 받았다며 최 명인은 침선 수업이 소감을 털어 놓는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최 명인은 힘드는지 몰랐고 마냥 신바람이 나서 옷을 지었다고 자랑삼아 말한다. 1년 동안 시어머니로부터의 바느질 수업은 최 명인에게 새로운 세상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차츰 손맛이 익어갈 무렵에는 근동에서 바느질 솜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최 명인의 침선솜씨는 진정한 가정학습에서부터 싹이 트고 성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 명인의 진정한 스승은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특히 시어머니로부터 시누이의 농지기를 만들면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는 것을 최 명인은 거듭 강조한다.
삯바느질의 시작
최온순 명인이 시집에서 분가하여 지금의 익산시 함열 와리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된 것은 시집살이 1년만의 일이다. 최 명인의 남편께서 함열초등학교로 전근을 하게 된 때문이었다.
최 명인은 독립적인 가정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삯바느질하는 독공(獨工)이 시작된 것이다.
바느질 솜씨로 잘 알려진 최온순 명인이 와리 부락의 새마을 부녀회장직을 맡으면서부터는 한복을 만들어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 그리고 각 마을의 부녀회장들이 홍보도 해 주고 또 모아오는 바람에 최 명인으 바느질감은 날로 늘어만 가게 되었다. 이것이 또한 선생의 솜씨가 날로 늘어가는 계기가 된다.
‘소문으로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문전박대를 합니까? 그래서 일감을 맡게 되고 일단 맡은 일감은 모두 약속한 기일내에 끝마쳤습니다.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고...결국은 손목을 다치기도 했죠. 사실 쏠쏠한 부업의 재미도 있었고 그것이 아이들이 교육비에 보탬이 되기도 했습니다. 날 새는 날에는 남편이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말없이 묵묵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으니까요.’
결국은 손목을 다쳐서 한동안 고생을 했지만 최 명인은 손님을 배려하고 철저히 약속을 지켰다. 최 명인의 고집스런 성정(性情)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최 명인은 주로 새벽에 작업을 많이 했다. 정신을 집중해야 옷을 잘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16번이나 이사를 다니는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도 최 명인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재봉틀만은 재산목록 1호로 알고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면서 비좁은 골방에서 바느질을 했었다.
삯바느질 하느라 바쁜 시간에도 최 명인은 상당히 어려운 삼겹저고리 같은 옷을 만들 때는 유명하다는 바느질집에 옷을 한 벌 맡기고서 군것질거리를 사가지고 가서는 서너 시간 놀면서 그 기법을 눈에 담아 왔다가 집에서 연습을 거듭해서 익힐 정도로 열심이었다. 최 명인은 ‘내가 좋아서 시작한 바느질이지만 평생의 업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전통 서민옷만을 모아 선 보이다.
1997년 6월 7일부터 12일까지(전주풍남제전기간) 전북예술회관 제2전시실에서는 아주 뜻깊은 전시회가 열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주제로 선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전통 서민옷을 중심으로 연구한 최온순 명인의 전통복식 전시회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접하게 되는 강보(쌈보)에서부터 평생동안 철 따라 입고 살아가는 옷, 그리고 삶을 마감하고 마지막 가는 길에 입고 가는 수의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많았다. 이 전시회는 최 명인이 평생 매달리다시피 해서 만들어 가지고 있던 우리 서민옷들을 자신의 회갑연을 대신하여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었다.
전시회를 마친 후 최 명인은 총 280여점이나 되는 전시품을 숙명여대 박물관에 기증하여 교육용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박물관 같은 곳을 가보면 궁중의상이나 양반들의 옷은 잘 보관·진열돼 있으나 서민들의 옷은 소외당해 별로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나만이라도 호남지방을 기점으로 하는 전주지방 서민 계층의 옷을 만들어 보관하도록 해야겠다는 뜻에서 시작했던 겁니다. 옷을 잔뜩 만들어서 전시를 하고 나니 어디에 기증을 하면 영원히 잘 보관되고 활용될 수 있을까? 고민 하던 중 숙명여대에 여속박물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여속박물관은 부엌문화에서부터 장독문화, 의복문화 등이 잘 전시되어 있고 여자들의 생활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숙명여대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겁니다.”
최 명인은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고나서 한국의 전통적인 서민들의 옷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며, 1960년대 이후 분별없이 외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부터 우리 옷을 멀리하는 경향이 짙어 이제는 입는 방법조차 잊혀져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옷자락을 어떻게 여미는지, 고름을 어떻게 매는지도 잘 모른 채 한복만 덜렁 몸에 걸치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옷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심 걱정스런 최 명인은 자신의 어깨에 큰 짐이 실리는 것으로 느껴지며 전통 한복을 전공하는 한 사람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한다.
전통 한복에 관한 체계적인 복식 공부
최온순 명인은 익산시 함열읍에 살다가 자녀 교육을 위하여 전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삯바느질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997년 최 명인 본인의 회갑을 기념하여 이 고장의 서민옷을 중심으로 한 전통복식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회를 마치고 작품 모두를 숙명여대 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다. 그 작품을 인수하러 오신 박태자 교수님이 최 명인의 바느질은 아까운 솜씨이니 훌륭하신 교수님의 사사를 받아 전공을 살려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며 서울에 사시는 박경자 교수님(전 서울 성신여대 한국복식담당교수)을 소개해 주셨다. 이것이 최 명인이 체계적으로 복식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전통복식에 관해서 보다 학술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 하던 때라 최 명인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 때부터 박경자 교수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된 최 명인은 단국대학교 평생교육원 제 1기생으로 등록하여 전통복식과정을 이후했다. 그 후로로 최 명인은 더 배우고 싶어서 다시 6기 공부를 수료했다. 이 무렵 최 명인은 남편이 직장 관계로 다시 익산으로 이사를 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익산에서 서울을 오가며 공부했다. 당시 공부하던 때 겪은 고생은 즐겁게만 느껴졌다는 최 명인은 ‘1주일에 한 차례씩 익산역에서 새벽 5시 25분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다시 78번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단국대학교 정문에서 내리면 교정 안엔 꽃같이 젊고 고운 학생들이 바삐 오가는 틈새를 지나노라면 육십 고령인 만학도가 청춘이라도 된 듯 싶어 마음이 흥분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최 명인은 ‘ 시 단국대 캠퍼스 내 잘 다듬어지고 잘 손질해 놓은 꽃을 바라보고 숲길을 지나 200여개나 되는 계단 길을 걸어 올라 강의실 앞에 다다라 등에 땀이 흠뻑 배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루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버릴 정도로 즐거운 공부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단국대학교 평생교육원 박성실 교수님과 고부자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값지고 유익한 강의였다. 광주에 사는 배삼례 씨라는 분이 함께 공부하게 되어 외롭지 않게 공부할 수 있어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단국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배삼례 씨와 함께 서울역 근처의 여관에서 피곤했던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동부 이촌동에 사시는 박경자 교수님 댁으로 가서 공부를 한 다음 그 날 밤차를 타고 내려오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박경자 교수님으로부터는 한국복식사를, 단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는 출토복식이 유물 복원 학습을 도면 보기와 제도하기, 그리고 손바느질로 재현하는 공부를 주로 했다. 이 기간에는 차시간을 맞춰 통학하랴, 숙제하랴,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은 물론이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여서 부족한 잠은 익산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기차 안에서 많이 보충하면서 그저 배우는 것만으로라도 즐겁기만 했었다.
공방 없는 독공(獨工)이 날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복식연구는 계속 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돋보기를 써야지 바늘귀가 보이고 정교한 작업에는 힘이 들지만 우리 것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요람에서 배냇옷을 입었고 세상을 하직할 때는 수의를 입는 것처럼 무덤까지라도 복식연구에 심혈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선생은 해마다 열리는 복식문화학회 주관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에 바느질 한땀한땀을 뜨면서 화사하게 웃는다.
한복의 과거와 미래
사람들의 생활 풍속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복식(服飾)이다. 복식 풍속은 식생활이나 주생활과 함께 생활문화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예의와 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현상이다.
우리나라의 복식문화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복식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초목의 껍질과 동물의 가죽이나 털로 의복을 삼았을 거라는 추측이다.
발견된 복식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다. 거기에서 재봉용 바늘과 방직용 방추자, 그리고 몸을 장식하던 귀고리, 팔찌 등이 발견되어서 그때의 복식기원의 일면을 짐작하게 한다.
선사시대의 기본형태를 기반으로 한국 복식의 고유한 양식을 형성한 시기는 보통 삼국시대로 보는데, 말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복식양식이 많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의 복식제도는 왕실과 귀족층 일부의 관복과 예복에만 국한되었고 그들도 보통 때는 우리의 전통옷을 입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외래복식과 고유복식의 이중구조는 계속 이어져 우리 복식의 한 특징이 되기도 하였다.
일축해서 말한다면 우리나라 복식은 상류층에서는 외래 복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서민층에서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 복식을 끈질기게 전수해 온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서민들의 복식문화에 대한 연구는 대단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치마 길이는 짧게, 폭은 활동하기 편하도록 좁게 해서 통치마로 고치고 꽉 졸라맨 허리는 편하게 조끼식으로 고쳐요. 저고리의 소매는 짧게 끊고, 소매통은 활동하기 편하게 좁게 만들고 긴 고름은 떼어내고 매듭단추를 달고, 종이로 배접해 단 동정을 박아서 달면 세탁하기에 편리하게 고쳐 입을 수 있어요. 이 어려운 때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이기도 하지요.”
최 명인은 장롱 속에서 잠자고 있는 한복을 꺼내어 생활복으로 개량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의례복을 평상복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 복식(服飾) 전승 계보는 다음과 같다.
문인순 교수(공주 여자사범학교 재봉 담당 교수)로부터 박경자 교수(전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한국복식 담당 교수)로 전해진 한국 복식은 최온순 명인으로 이어지고 다음으로 최장곡, 박태복, 배삼례, 이효순, 박순자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인순 교수(공주 여자사범학교 재봉 담당 교수)로부터 박경자 교수(전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한국복식 담당 교수)로 전해진 한국 복식은 최온순 명인으로 이어지고 다음으로 최장곡, 박태복, 배삼례, 이효순, 박순자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