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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윤규상
  • 종사분야
  • 우산장 / 지우산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5호
  • 지정날짜
  • 2011.09.30
  • 주소
  • 전주시 덕진구 반태산3길 29
  • 이메일
  • 기타
무형문화재 소개

윤규상 명인은 국내 유일의 지우산 장인이다. 1943년 완주에서 목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손재 주가 좋았고, 1960년 우산공장 견습공으로 입사하게 된다.

 

대나무로 만든 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발라 만든 지우산이 대중화됐던 시대. 대나무 살대는 바람이 불 어도 뒤집어지는 일이 없고, 기름먹인 한지는 가죽만큼이나 튼튼하고 견고했다. 특히 질 좋은 전주한 지로 만든 전주의 지우산은 전국은 물론 일본과 독일로 수출까지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비닐우산이 등장하고, 80년대 우산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도 한동안은 대나무 뜨개바늘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왔지만, 지우산을 잊지 못하고 2005년부터 다시 지우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2~3년에 걸쳐 작업용 기계를 개발하는 등 독자적인 노력으로 전통 지우산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윤규상 명인은 지우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서가 녹아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대나무를 골라 살 대를 만들고 한지에 들기름을 바르는 일까지 80여 차례의 손길이 가는 제작 공정을 고집스럽게 직접 해낸다. 이런 노력들로 윤규상 명인의 지우산은 전통예술 공연과 사극 영화 등에서 인기다. 2010년에는 G20정상회의 기념 특별전에 초대돼 선이 곱고 단아한 전통 지우산의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1943년 완주 출생

·2011년 무형문화재 우산장 지우산 지정

·2015년 문화재청 산하 재단법인 예올 ‘올해의 장인’ 선정

·현재 비꽃 운영 

라이프스토리

 

 

지우산은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우산을 말한다. 대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견고함과 고풍스러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우리 전통우산 중 하나다. 그러나 지우산은 불과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이 사용하던 생활필수품에서, 현재는 그 존재 자체가 거의 희미해져버린 물건이 되었다.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비닐우산이나 천우산에 그 자리를 내주면서부터다.

 

윤규상 명인은 자칫하면 옛 기록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지우산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어렵게 이어오고 있다. 지우산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한 때는 뜨개바늘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그때도 지우산을 손에서 놓지는 못했다. 

 

비닐우산이나 천우산에 밀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지우산을 찾지 않을 때에도, 윤규상 명인이 지우산을 손에서 놓지 못했던 까닭은, 꽃다운 나이 열일곱부터 거친 대나무에 수없이 손을 베고 찔려가며 익혔던 지우산이 누군가는 지켜내야 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서가 녹아있는 물건이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우리 전통지우산이 오래도록 전승되는 것이 희망인 윤규상 명인은 이를 위해 오늘도 전통 지우산의 현대적 활용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윤규상 명인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1년에는 ‘우산장’으로 무형문화재에 선정되었다. 우산장으로는 전국적으로도 유일하다. 

 

 

장인의 손길과 정성이 만들어낸 명품, 지우산

지우산은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우산을 말한다. 대살에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만든다. 지우산은 불과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이 사용하던 생활필수품이었음에도, 현재는 그 존재 자체가 거의 희미해진 물건이다.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비닐우산이나 천우산에 그 자리를 내주면서부터다.

 

윤규상 명인은 자칫하면 옛 기록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지우산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어렵게 이어오고 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1년에는 ‘우산장’으로 무형문화재에 선정되기도 했다. 우산장으로는 전국적으로도 유일하다. 

 

비닐우산이나 천우산에 밀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지우산을 찾지 않을 때에도, 윤규상 명인은 지우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꽃다운 나이 열일곱부터, 거친 대나무에 수없이 손 베어가며 익혔던 지우산은 누군가는 지켜내야 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서가 녹아있는 물건이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우산을 만나다

윤규상 명인은 1941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삼삼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윤덕용 씨는 목수였다. 하지만, 그가 네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만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덕분에 그는 다른 친구들보다 3년 늦게 용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남들보다 늦었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끝을 보고 마는 성격 탓에, 졸업성적은 우수했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위한 시험에서도 전체 33등으로 합격했다. 

 

“그때 합격은 해놨는데,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서는 자꾸 왜 안 오냐고 연락이 오고.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에 한번은 찾아갔어요. 사정이 이러저러 한데,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면 다니고 싶다고 그랬더니, 그건 또 안 된다고 그래.”​

 

 

 

초등학교 졸업하고 막 열일곱 살. 당시 그의 나이 또래가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전주에 전매청과 성냥공장, 주물솥 공장, 대장간, 양복점, 그리고 군산에 고무신 공장 정도가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특별한 일자리가 없던 시대였다. 

 

그가 찾아간 곳은 그가 살던 마을과 그리 멀지 않던 장제마을이었다. 1950년대 당시 장제마을에는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우산을 만들던 공장이 아주 많았다. 

 

“내가 살던 동네와 가까웠어요. 학교에도 그 동네에 살던 친구들이 아주 많았고. 그때 장제마을에는 40여 가구 정도가 있었는데, 절반 정도가 우산을 만들었어요. 농사를 지으면서 우산을 만들어. 20여 가구 정도가 집집마다 분업화해서 우산을 만드는데 적게는 5~6명에서 많게는 20여 명 정도까지 일꾼들을 고용해서 일했어요. 1950년대 그 피폐하던 때에도 그 동네는 농사짓고 우산 만들어 팔면서, 다른 마을에 비해 엄청 잘 살았어요. 이웃마을 사람들 중에도 그 동네 가서 일 안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빨리 우산 배우는 것만 생각해

장제마을 우산공장에서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우산 손잡이 부분의 대나무를 다듬는 작업이었다. 마디가 져 있는 부분을 깎아내어 손잡이를 매끄럽게 하는 작업이었다. 하루 종일 앉아 발로 대나무를 굴렸다. 대나무 마디 부분에 대패가 설치되어 있어 대나무 마디를 깎아 내도록 되어 있었다. 하루 수백 개 씩 손잡이를 다듬었다. 

 

“당시에 우산은 박리다매였어요. 많이 만들어서 팔수록 이윤이 남는 거였어. 그런데 우산 만드는 작업이 너무 복잡하고 까다로워. 한사람이 한 개씩 붙들고 앉아 있으면 하루에 몇 개 못 만들어요. 그러니까,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 있었어요. 그래야 하나라도 더 많이 만드니까.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대나무를 쪼개고,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꼭지를 끼우고, 어떤 사람은 종이를 붙이고, 이런 식이었어요. 그래서 하나 하는데 얼마씩 단가가 정해져 있어가지고, 자기가 일한만큼 돈을 받아가는 거지. 이렇게 해서 하루에 몇 백 개씩 만들었어요.”

 

장제마을 우산공장에서 목수의 피를 이어받은 윤규상 명인의 손재주는 금방 눈에 띄었다. 딴 사람들에 비해 일을 배우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윤규상 명인이 처음 들어간 공장은 직원이 20여 명이 이르는 큰 공장이었다. 하지만, 철저한 분업화된 작업 탓에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규상 명인은 하루빨리 우산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기술을 모두 배우고 익히면, 자신도 공장을 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서 보니까, 대를 쪼개서 살을 만드는 역할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근데, 그걸 배우기가 쉽지 않아. 왜냐면 대나무로 우산 만드는 공장에서는 대나무가 돈이잖아. 그걸 연습한다고 쪼개면서 못쓰게라도 나와 봐요. 그걸 누가 하라고 하겠어. 그래 몰래 했죠. 작업 끝나면 몰래 남아서 대나무 가지고 열심히 쪼개는 연습을 했어. 대 쪼개는 것이 뭔 대수냐 싶겠지만, 사실 그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특히 우산은 전부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각 부분에 맞는 대나무를 빨리 많이 쪼개고 다듬어야 하는 거라, 엄청난 숙련도가 필요했어요.”​



손에 대나무에 베이고 찔린 핏자국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연습한 끝에,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쓸 만한 우산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공장 주인에게 대 쪼개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대 쪼개는 일만 하게 해 준다면 공장 주인이 원할 때까지 임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일하던 공장은 장제마을 안에서도 규모가 큰 공장이었고, 워낙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 쪼개는 역할을 쉽사리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공장을 옮겼다. 5~6명이 작업하는 소규모 공장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적다보니 그만큼 보다 쉽게 다양한 작업 과정들을 배울 수 있었다. 우산 만드는 일을 빨리 배우고 싶었던 그에게는 더 없이 좋은 공장이었다. 특히 그가 두 번째 들어간 공장에서는 20여 가구 되는 장제마을 우산공장 중 그때까지 유일하게 지우산을 만들고 있었다. 지우산은 비닐우산보다 훨씬 손품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까다로운 우산이었다. 지우산을 배우고 싶었던 그에게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제가 열여섯 살, 그러니까, 딱 장제마을에 들어갈 때 즈음에 나일론이 나왔어요. 그러다가 곧 이어 비닐이 나왔어. 비닐을 이용해 하우스 농사를 짓더라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비닐을 이용해서 비닐우산이 나와요. 지우산보다 비닐우산에 살이 덜 들어가는 것 빼고는 지우산이랑 비닐우산 만드는데 차이가 별로 없어요. 지우산은 살을 마흔 개 대는데, 비닐우산은 스무 개 정도 댔죠. 처음에는 비닐도 아주 두꺼웠어요. 그만큼 견고해서 가격도 지우산보다 비쌌어요. 초반에는 오히려 비닐우산을 돈 많은 사람들이 쓰고, 지우산은 서민들이 쓰던 우산이었죠. 그런데 해가 지날수록 우산살이 한두 개 씩 빠지기 시작하고, 비닐도 얇아지기 시작하더라고. 비닐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보다 십분의 일로 얇아지고, 우산살도 나중에는 여덟 개로까지 떨어졌어요. 한 집서 가격을 낮추면 다른 집도 단가를 맞추려고 하다보니까 계속 재료가 빠진 거지. 경쟁이 붙어서. 그렇게 허술해지더니 처음에는 지우산보다 비쌌던 비닐우산이 나중에는 한번 쓰고 버리는 되어버렸어요. 가격도 지우산보다 훨씬 싸졌고. 한번만 쓰고 버린다고 해서 ‘하루우산’이 되어버린거야.”

 

지우산 한 개 만들 때, 비닐우산은 5~6개 씩 만들어 냈다. 사람들도 값싼 비닐우산을 찾게 되면서 지우산은 점차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가 처음 들어갔던 공장에서도 지우산과 비닐우산을 함께 만들다가, 나중에는 비닐우산만 만들게 되었다. 

 

우산 만드는 작업은 구정이 지나면서 시작했다. 여름 장마철을 대비해 구정부터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산은 창고에 계속 쌓아놨고, 장마철이 닥치면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커다란 트럭들이 와서 가득 싣고 가곤 했다. 우산 만드는 작업은 추석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자연히 추석이 지난 후부터 다음해 구정 무렵까지는 우산공장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당시에는 저 같이 스무 살도 안 되어서 생계에 대한 부담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에요. 저도 우산공장이 문을 안연다고 마냥 놀 수는 없었어요. 뭐라도 했죠.”

 

손재주가 좋았던 윤규상 명인은 우산공장이 문을 열지 않는 때면, 나무젓가락을 만들어 팔았다. 당시에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활필수품을 만들어 파는 경우가 많았다. 제재소에서 나무를 떼어다가 젓가락 형태로 다듬고, 기계로 마무리를 했다. 넣으면 떼어내기 쉽게 홈이 파여 나오는 기계였다. 당시 쌀 한가미니 값을 주고 그 기계를 구입했다. 덕분에 우산공장이 문을 열지 않던 때에도 먹고 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웬 사람 두 명이 찾아왔어요. 나더러 나무젓가락 만드는 기계를 팔래.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젓가락을 만들어 오겠다고 그래. 왜냐하면 돈 주고 사지 않아도 거기에는 나무가 지천으로 있다는 거야. 그때 나무젓가락 만드는 나무가 가격이 꽤 나갔어요. 왜냐면 작은 걸 만들다보니까 옹이가 져 있으면 안 되고, 아주 고르고 깨끗한 나무여야 했거든. 그런데, 나보고 같이 가자고 그래요. 마침 우산공장 문 열 때까지 시간이 좀 있어서 따라 나섰죠. 그때 쌀하고 된장만 가져갔을 거에요. 잠 잘 곳, 먹을 것 다 산에서 해결하면서 지냈어요. 한 보름 일했나, 갑자기 산 아래서 사람이 하나 올라와서 빨리 내려오래요.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잘못하면 영창에 갈 수도 있다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그 일도 접고 그랬죠”

 

윤규상 명인은 우산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야간상업중학교에도 다녔다. 우산공장 일이 끝나고 10리길을 달려가듯 매일 같이 다녔다. 그렇게 가도 하루 세 시간 수업 중 두 시간 밖에 듣지는 못했다. 더욱이 그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우산 일을 빨리 배워야겠다는 생각뿐이어서, 공부에 크게 집중하지도 못했다. 

 

 

 

25살에 독립, 우산공장을 차리다

어린 두 손에 항상 대나무에 찔리고 벤 상처를 안으며, 지우산 만드는 완벽한 기술을 습득한 윤규상 명인은 스물다섯 살에 독립한다. 본격적으로 지우산 제작이 뛰어든 것. 직원만 해도 열 명이었다. 그가 우산공장을 차리던 1965만 하더라도 장제마을을 비롯해서 전주인근에만 서른다섯 개 정도의 우산공장이 있을 만큼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우산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당시에 열 명의 기술자를 데리고 일했어요. 한 달에 보통 3천개 정도 우산을 만들어 팔았으니, 꽤 괜찮았죠. 없어서 못 팔 정도 였어요. 기술자들도 있었지만, 동네에 분업화해서 단가대로 맡기기도 했었죠. 그만큼 우산 찾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 전국적으로 우산공장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계모임을 하곤 했어요. 다 모이면 전국적으로 백여 명이 넘을 만큼, 많은 우산공장이 있었어요.”

 

그만큼 재료도 많이 필요했다. 지우산 만드는 데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재료는 대나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대나무로는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일본에서 수입까지 해올 정도였다. ​ 

 


 

“지금 전주시청 자리가 그때는 전주역이었어요. 당시에는 생활용품 중에 대나무로 만들었던 것이 많았어요. 우산도 그 중 하나였고요. 지금이야 대나무가 지천이지만, 그때는 대나무가 정말 귀했죠. 많이 필요했으니까, 남아나질 않았던 거죠. 그래서 일본에서 대나무를 수입해왔어요. 대나무들이 목포나 여수항으로 들어오면, 기차에 실려 전주까지 운반되곤 했죠. 그때 전주로 들어오는 대나무는 거의 장제마을에서 소비했다고 보면 돼요. 대나무가 들어오는 날이라고 하면, 집집마다 다 구르마 끌고 전주역으로 가서 기다리는 거죠. 구르마 하나당 세 사람씩 붙었어요. 한사람은 앞에서 끌고, 두 사람은 뒤에서 밀고 가는 거죠. 그런데 그때 전주역에서 장제마을 가는 길에 언덕길이 있었어요. 아무리 해도 세 사람으로는 못 올라갈 만큼 경사가 졌어. 그래서 구르마 스무 대가 언덕길 아래서 만나요. 한 대씩 한 대씩 사람들이 모여서 밀고 끌고 올라가는 거죠. 올려다 놓으면 또 다들 내려가서 가지고 올라오고. 그러다보면 구르마 스무 대가 저 언덕위에 쭉 서 있는 거야. 그 모습이 참 장관이었는데. 지금은 다 그 시절 이야기네.”

 

윤규상 명인은 1985년까지 20년 동안을 우산공장을 운영했다. 서른다섯 개에 이르던 전주의 우산공장들이 다 문을 닫은 후에도 혼자 한참을 운영하다 도저히 견디질 못하고 문을 닫은 것이다. 값싼 중국산 우산과 천우산이 대중화되면서 단가를 맞출 수 없게 되었고, 특히 우산을 맞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우산꼭지 만드는 공장이 수요 감소로 인해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윤규상 명인이 다른 공장들보다 오래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공장이 문을 닫기 전 우산꼭지를 대량으로 마련해 놓아 그나마 우산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커 천우산이라는 것이 나왔어요. 우리야 공장이라고 그래도 일일이 사람 손으로 만드는 가내수공업형태였지만, 천우산은 말 그대로 공장형 우산이었어요. 그래도 처음 나왔을 때는 엄청 고급 우산이었지. 정말 비쌌어요. 그래서 우리도 한 동안은 버틸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천우산도 경쟁이 붙더라고. 공장들이 하나둘 생기고, 경쟁이 붙으면서 기술개발도 하고 또 날림으로 엉성하게 만들기도 하면서 가격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수공업으로 하던 지우산, 비닐우산과는 경쟁이 되질 않았죠.”

 

하는 수 없이 문을 닫게 되었지만, 평생을 해오던 우산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보니, 마침 뜨개바늘이 눈에 띄었다. 지우산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숱하게 다뤘던 그였기에, 대나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 있었다. 더욱이 뜨개바늘은 그 수요가 적었던 탓인지 거대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 내지도 않아, 지우산 만들 때보다 벌이는 오히려 나았다. 하지만, 뜨개바늘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틈틈이 지우산 만드는 일은 손에서 놓지 못했다. 열일곱 살에 시작해 평생을 해오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일이었다. 언젠가는 다시 본격적으로 지우산 만드는 일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한 때는 1년마다 8톤 트럭 네 차 분량의 대나무를 소비할 만큼 잘 되었어요. 우산은 박리다매였는데, 뜨개바늘은 그게 또 아니었고,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지우산에 비해 이건 훨씬 쉽기도 했죠. 그런데 이것도 잠시였어요. 우리나라에서 뜨개바늘 만들던 사람이 중국에가서 공장을 차리고 역수출을 해버렸어요. 중국인건비가 워낙 싼 탓에 뜨개바늘 공장도 접어야 했죠.”​ 

 

 

 

다시, 지우산으로 

뜨개바늘 공장을 접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지우산을 만들어 줄 수 없겠느냐는 문의전화가 왔다. 본격적으로 다시 지우산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 두 개씩이야 그냥 만들 수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우산꼭지가 없었다.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지던 우산의 수요가 줄면서, 우산 꼭지 만들던 공장도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우산 만드는 연장도 문제였다. 연장을 구하기 위해 대장간을 돌아다녀봤지만, 찾아질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이 윤규상 명인은 연장을 그림으로 그려 직접 주문해 제작해야했다.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었다. 옛 방식을 그대로 지키고 싶다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정작 문제는 우산꼭지였다. 

 

“중국이나 일본은 지금까지 명맥이 안 끊기고 계속 우산을 만들어 온 모양인데, 어떻게 우리나라는 우산꼭지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지던 우산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어요. 지금도 지우산 만들었던 선배 몇 분이 살아계시는데, 그 분들한테 지우산 만들라고 하면 못 만들어. 꼭지가 없어서 그래요.”

 

우산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 우산살과 연결되는 우산꼭지다. 우산꼭지는 대죽나무에 우산살이 끼워지도록 깊이를 조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는 2~3년에 걸친 긴 연구 끝에 우산꼭지를 개발하는 일에 성공했다. 여전히 우산꼭지 만드는 일이 우산 전체를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후로 그는 지금까지 전주에서 유일하게 공방을 운영하게 홀로 우산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요즘 지우산에 대한 수요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지우산에 대해 모르니 수요가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윤규상 명인은 요즘 새로운 지우산 디자인 연구에 열중이다. 손잡이를 오죽으로 바꿔보기도 하고, 우산살을 늘리거나, 크기를 가지고 시험해보기도 한다. 

 

“지우산뿐만 아니라 비닐우산이나 천우산도 만들어봤어요. 그런데 다른 우산들과는 다르게 지우산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몇 곱절은 들어가요.”

 

지우산은 손길이 많이 가고 각 과정마다 정성을 다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완성되기까지 그만큼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지우산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질 좋은 대나무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윤규상 명인은 전남 담양에서 3년생 대나무를 직접 구입해 쓰고 있다. 우산 제작에 가장 어려운 우산꼭지는 윤규상 명인이 직접 떼죽나무로 만들어 사용한다. 우산살을 일일이 다듬고 조각하는 일에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우산의 형태가 만들어지면 끓인 들기름을 바른 한지를 붙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우산이 하나 만들어지기까지 꼬박 마흔여덟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 자체가 여간 까다롭고 힘든 것이 아니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엄청난 공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
 

 

소박하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지우산

그의 말처럼 오랜 공력과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지우산은 품질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뛰어나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가 일흔두 개의 우산살을 넣어 제작한 지우산은 그 우아함과 멋으로 서울공예문화진흥원 전시장에서 팔려나가기도 하고, 지난 2010년에는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전통지우산에는 소박하지만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요즘 우산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멋과 은은한 광채가 있는 거죠. 작은 부품 하나하나까지 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게 없어요. 그래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우산처럼 다 똑같은 우산이 아니라 우산 하나하나 마다 고유의 멋과 맛이 있어요.”

 

윤구상 명인은 워낙 귀하고 생소한 탓에 현재 전통공예품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는 지우산을 더 많은 연구를 통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빛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 예전처럼 비를 막고 햇볕을 가리는 용도는 아니지만, 소장용이나 장식용으로 주문이 수요가 생기고 있다. 지우산이 새로운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실내장식용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윤규상 명인은 정성을 다해 만들어 준다. ​
 

 

 

미래에도 가치 있는 지우산 계승하고 파

윤규상 명인이 세상이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불과 지난 2011년의 일이다. 

 

“문화재가 되었을 때, 아 이제 누가 알아주는 구나 싶어 얼마나 기쁘고 보람을 느꼈는지 몰라요. 열일곱 살 이후로 계속 우산을 만들어 오면서 내가 해왔던 일이 전통을 이어오게 했구나, 우산의 맥을 이어 왔구나, 싶어 보람을 느꼈죠. 지우산 만드는 일을 우리 아들이 이어간다고 해서 더욱 기쁘고요.”

 

지금도 윤규상 명인은 아내 김영님 씨와 함께 매일 종이우산을 만들고 있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 아들 윤성호 씨는 10여 년 전부터 아버지 일을 돕겠다며 휴일이면 집에 와 우산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다. 

 

윤구상 명인에게 최근 몇 년 간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과 ‘전주 전통공예대전’에 출품해서 상도 받고, 얼마 전에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한국공예디자인재단’에서 특별 초대를 받아서 전시도 했다. 일본 가나자와시와 한지문화진흥원 교류전에 초대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윤규상 명인의 희망은 우리 지우산의 기술이 단절되지 않고 오래도록 전승되는 것이다. 

 

“그간 지우산을 만들며 어렵고 힘들 때도 많았지만, 기쁘고 보람된 순간도 많았어요. 여러 대회에 출품해서 수상해보기도 했고, 2011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어요. 평생 우산 만드는 일밖에는 몰랐던 저한테는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기쁘고 보람 있는 일들이었죠. 제가 있기에 우리 지우산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도 느낍니다. 마지막까지 지우산을 꾸준히 만들어야죠.”

 

윤규상 명인은 앞으로 지우산의 계승 보존과 함께 활성화에도 노력할 계획이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에는 아직까지 지우산을 많이 사용해요.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만 지우산에 대한 수요가 끊어져 버렸죠. 정부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지우산도 우리 전통문화인데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지우산을 지키고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윤규상 명인은 우리 지우산의 활성화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려 있다는 점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제가 노력해서 어떤 디자인의 지우산을 만들고, 그래서 어떤 활용도를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새로운 개념을 가진 좋은 디자인의 지우산을 만들면 일반인들이 당연히 호응해주고, 지우산의 수요도 생기게 되겠죠. 지우산이 다시 사랑받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할 겁니다. 소비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지우산을 지금보다 더 널리 알리고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죠. 그게 지우산을 계승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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