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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유배근
  • 종사분야
  • 한지발장 / 한지발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31호
  • 지정날짜
  • 2005.03.11
  • 주소
  • 전주시 완산구 어진길 60-6
  • 이메일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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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소개

유배근 명인은 1940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한지를 뜨는 대나무 발, 한지발을 만드는 한지발장은 전국 적으로 유배근 명인 뿐이다. 좋은 종이를 얻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로 만든 고운 면의 한지발이 필수로 유일한 장인의 기술은 그만큼 가치가 높다.

 

일제강점기, 그의 어머니는 일본을 피해 중국으로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완주군 소양면 한지산업조합 에서 배운 솜씨로 한지발을 만들어 생계를 꾸렸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 유양수 선생은 어머 니에게 직접 한지발 만드는 일을 배워 함께 일했다. 그도 13살이 되던 해부터 부친의 일을 거들기 시 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지산업이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온갖 어려움을 겪 어야 했지만 그는 한지발을 놓지 않았다. 한지발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기계화와 중국 산 저가 제품에 우리 전통한지가 밀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의 작업은 계속됐다.

 

한지발은 한 달을 꼬박 매달려 겨우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 한지발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들마저 생 산이 중단된 지금 유배근 명인은 직접 한지발 제작에 필요한 발틀까지도 제작하고 있다. 50년 넘게 한 지발을 만들어 온 그는 2005년이 되어서야 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가 이 길을 포기했더라 면 한지발은 물론 전통한지의 맥도 끊겼을 것이다. 지금은 그의 셋째 아들 창호 씨가 할아버지에서 아 버지로 이어진 가업을 지켜가고 있다.

 

·1940년 전주 출생

·1960년 한지공장에서 일하며 한지발과 한지를 제작

·1985년 전북 공예품경진대회와 2002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상

·2007년 한스타일 스페인 마드리드 전시, 2010년 부천 무형문화재 엑스포 기획전시, 2011년 전주아 시아태평양 무형문화축제 전시 참여

·현재 아들 유창호 씨와 한지발 제작 

라이프스토리


 

한지발 만드는 마지막 명인 

전주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한지, 한지의 우수성과 실용성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좋은 질의 종이를 가능케하는 한지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좋은 발에서 좋은 종이가 나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지, 하지만 한지발의 기능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당연히 만드는 방법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지.”

40년째 한지발을 만들어 온 유배근, 서정임 부부는 한국에서 한지발을 만드는 마지막 명인이다. 서울 인사동과 부산, 대구 등 전국의 한지공장에 발을 대주고 있는 유 명인은 아버지로부터 한지발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그에게 한지발 작업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시절, 든든한 가계였고, 4명의 자녀를 장성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한지발은 세월의 변화와 함께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다. “한지발의 모습이 꼭 늙어가는 우리네 모습과도 같네 그려.” 

유 명인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짓지만 한지발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하지 그지 없다고 한다. 

종이문화축제다 뭐다 해서 전주 종이에 대한 연구는 부쩍 늘었다. 물론 한지 작가들도 따라서 부쩍 늘었다. 그런데 한지발의 수요는 급격하게 감소했다. 그것은 한지발이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 들어 온 외국산으로 바꿔지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 봄, 전주에서 같은 길을 걸어 온 이가 돌아가셨다. ‘이제 정말 나뿐인게로구나’ 생각하니 더 쓸쓸하고 마음이 안 좋아. 지금도 외국산 일색인데, 앞으로는 한국 땅에서 한지발을 찾아볼 수 없게 생겼으니 말이여.”

특히나 한지발을 만드는 마지막 세대라는 불안함은 늘 이들 부부의 풀지 못한 숙제처럼 따라 다닌다니고 있다. 한지발은 기계로 뚝딱뚝딱 찍어내는 게 아니라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섣불리 배운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발을 만드는 초(대나무살)를 만드는 것만 해도 대나무를 고르고, 표피를 긁어 얇게 뜬 대나무를 다시 물에 불려 눈금만큼의 크기로 짜갠 뒤 모나지 않게 칼로 훑는 등 하루는 족히 넘게 걸린다. 한지발을 엮는 작업은 이보다 더하다. A4용지 크기만한 한지발은 하루를 꼬박 매달려야 하고, 대발의 경우는 한두달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손을 놀리지 않으면 제 날짜에 물건을 넘기지 못한다.

또 지금도 유 명인은 발초를 엮는 작업에 쓰이는 추를 직접 황동을 깎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그는 발틀못 역시 구리를 손톱크기만큼 잘라 쓰는 등 일일이 작업에 쓰이는 도구들을 직접 제작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한 가지 일을 해내는데 시간이 오래걸려 늘 주문이 밀려있는 상태가 된다. 

그동안 이들 부부는 바깥 나들이는 고사하고 남의 집 애경사 한번 다음 놓고 참석하지 못했다. 주문받은 물건을 제 날짜에 대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 명인의 한지발은 수제품이라 단가가 비싸다 보니 주문자들은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는 외국산 발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문량도 하루가 다르게 적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유 명인 부부의 일거리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일이다. 

유 명인은 상당히 늦게 한지발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다. 

“그 동안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정리해 놓은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지원책도 마련하고 전수자도 받으려면 우선은 사회적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어 마음이 급하네.’

이들 부부는 몇 해 전부터 한지공예가들의 도움으로 대학 연구소에 수소문하여 한지발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용인 호암미술관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이에 차츰차츰 전주 한지발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유 명인의 바람은 이들이 일하는 전주시 동서학동 가파른 비탈길에 위치한 작업장에서 한지발을 만드는 대나무 훑은 소리가 오래도록 흘러나오는 것이다.​
 

             

 

명품의 탄생 

우선 발을 만들려면 질 좋은 대나무가 필요하며, 질 좋은 대나무는 왕대로서 크고 곧은 4년생 대나무를 사용한다. 대나무 채취 시기는 양력으로 1월 내지 2월이 적당하다. 이 때는 대나무에 수분이 많이 떨어지고 물이 오르기 전이다.

이렇게 채취한 대나무는 표피를 긁어내고 마디를 잘라낸 다음 1cm 정도 쪽을 낸다. 그 다음은 피죽만 떼어내어 소금물에 5시간 가량 열을 가한다. 삶은 피죽은 태양 건조로 2,3일동안 바짝 말린다. 

이렇게 건조한 대나무는 1mm정도로 잘게 쪼개어 끝을 송곳처럼 깎은 다음 물 속에 2일 정도 담가 놓는다. 이렇게 불은 대나무는 옆으로 비틀면 일정하게 1mm로 잘게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발을 만드는 발촉이 된다. 

잘게 떨어진 살은 강판에 작은 구멍을 뚫어 끝을 깎는다. 처음에는 살을 조금 큰 강판 구멍 속으로 넣어 집게로 뽑아낸다. 이내 다시 그것을 보다 작은 구멍 속으로 집어 넣었다 뽑아낸다. 이렇게 하면 발촉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발촉을 태양에 말려서 묶은 다음 빨래판에다 비빈다. 그러면 발촉의 가는 꺼락이 털어진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발촉은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나게 된다. 

한지 공장에서는 발을 주문할 때 소용되는 용도에 따라 크기와 굵기를 다르게 요구한다. 그러면 주문하는 대로 거기에 맞게 만들어서 한지 공장에 납품을 한다. 한지발은 문발로도 사용할 수가 있다. 

 

이렇게 살았다.

유 명인이 발에 대한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은 부친으로부터이다. 즉 그의 집안으로 보면 유 명인은 한지발 2대인 셈이다. 부친은 당시 완주군 소양면의 한 한지공장에서 일하던 어머니로부터 한지발을 배웠다. 

유배근 명인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보기 싫어서 중국으로 떠나 그 곳에서 방랑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집안이 기울게 되었고, 어머니께서 생활을 전담하여 꾸려나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일감을 찾아 다니던 중,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에 있는 산업조합에서 한지발 기술을 배워 일을 하기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한지발 일을 시작한 지는 유 명인이 태어나기 10년 전부터였다고 한다. 

유 명인의 부친은 18세에 혼인을 하고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딸은 유 명인의 누님이 되는 셈인데, 전염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 후로 부친이 중국 방랑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부친이 중국에서 돌아와 고향에 정착을 하게 되면서 한지발 일은 집안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수단이 되었다. 부친은 원래 선비였던지라, 심한 노동은 하지 못하고 그저 농사일을 맡아보거나 어머니의 일을 돌보다가 한지발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유 명인보다 4세 위인 누님을 두게 되었고, 1940년 음력 5월 20일, 부친의 나이 36세 때 유 명인이 태어나게 되었다. 드디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싶었는데, 뜻하지 않게 어머니께서 유 명인이 태어난 해 12월 9일, 세상을 하직하셨다.​ 

 


 

유배근 명인은 어머니의 사망으로 젖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고, 그러한 원인으로 병이 들어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다. 부친은 유 명인을 키우기 위해서, 마음을 굳게 다지고 새어머니를 맞이하셨다. 새어머니는 유 명인보다 7세 위인 형님 한 분과 4세 위인 누님 한 분 그리고 2살 위인 젖먹이 누님까지 모두 세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새어머니는 4살 위인 누님을 외갓집에 맡겼고 그래서 형과 젖먹이 누나만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러자 식구는 모두 7명이 되었다. 아버지, 새어머니, 7세 위인 형님, 2세 위인 누님, 친어머니가 낳은 4세 위인 누님 그리고 유배근 명인까지 대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로 새어머니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1월, 9살 아래인 남동생이 태어났다. 남동생 이름은 유남근이었고, 그 후로 1954년 4월, 유남근 보다 4세 아래인 종근이가 태어났다.

유배근 명인은 11세 때 6.25전쟁을 겪었다. 당시 유 명인은 소양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었다. 소양에 들어 온 공산군들은 지역별로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북한 국가와 북한을 찬양하는 학습을 시켰다. 이 때 학습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반동분자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렇게 처참한 전쟁이 끝나고 9월 28일 수복이 되어 주민들은 모두 한시름 놓게 되었다. 

1952년 2월, 유배근 명인은 중학교 진학을 위해 시험을 대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중, 아버지로부터 진학 시험을 보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부친은 전쟁 중에 집안 형편이 심각할 정도로 기울게 되었음을 알려 주면서 여유가 생기면 그 때 시험을 치루라고 당부하셨다. 13세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유 명인은 부친을 따라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돈을 벌기는 했지만 집안이 계속 기우는 바람에 유 명인은 중학교 진학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유 명인의 나이 17세 때 더할 나위 없이 잘 해 주던 새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누님은 출가를 하고 어느 샌가 집안에는 부친과 어린 동생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부친은 생활을 돌보지 않으시고 술과 도박판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때부터 유 명인은 집안을 돌보는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둘째 동생인 종근이가 뜻하지 않은 병으로 6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독하게도 슬프고 가난한 세월이 지속되던 중 유 명인은 19살 때 부친을 떠나 전주로 나와 한지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친은 동생 남근이를 데리고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다리목 마을로 가서 어린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을 열어 생계를 꾸려갔다. 유 명인은 청년 시절, 밥벌이를 위해 한지공장에 취직한 게 평생의 업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26세 때 유배근 청년은 20살 먹은 아가씨 서정임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조수 일을 하면서 한지와 한지발 기술을 배웠다. 부부가 함께 만든 한지발은 점차 입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거의 모든 한지공장들이 유 명인 부부의 한지발을 사용했을 정도로 이들 부부가 만든 한지발은 품질이 좋았다. 이렇게 2007년 올해로 43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값싼 중국한지가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국내에는 한지공장이 몇 개 안 남을 정도로 중국 한지의 침해가 크다. 이제는 한지발도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와 있다. 일생을 돌아보는 유 명인은 지나간 세월이 슬프고도 험악했다고 회고한다.

전주시 동서학동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 치명자산을 등지고 선 집이 바로 그의 생활 터전이자 한지 발의 명맥을 잇는 작업장이다. ​ 

 

그는 전국의 내노라하는 한지생산업체를 단골로 두고 있다. 그의 손 기술이 뛰어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지발을 만드는 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지 발을 짜는 시간은 고됨의 연속이다. 담양에서 사온 대나무를 일일이 얇게 깎아 좀이 슬지 않도록 소금을 넣어 5시간을 삶아내야 하고 이를 다시 3번에 걸쳐 ?고 말끔하게 다듬어야 비로소 발 짜는 준비가 끝난다. 일단 발을 짜기 시작하면 쉴 틈이 없다. 기일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큰 발은 한 달을 꼬박 짜야 완성할 수 있다. 틀을 짜 넣는 일도 보통 손 가는 작업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되는 발은 한 달에 1-2개, 30만원부터 비싼 것은 100만원이 넘는 고가이지만, 공급도 버겁고 수요도 없어 살림은 늘 빠듯하다.

말총을 일일이 엮어 짜는 전통한지 발은 그가 더욱 정성을 쏟는 품목이다. 전통한지는 흐름 뜨기 방식으로 두 번을 떠 붙여야 하기에 정교함이 더욱 요구된다. 

‘정성 없으믄 발이 변변하니 나오질 않어. 좋은 종일 뜰라믄 좋은 발을 써야하는대, 어디 있간, 수요가 없으니 배울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한숨만 나오네.“

여섯 평 작업장을 터전 삼아 한지 발의 맥을 잇고 있는 그의 손엔 이미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유배근 명인이 한지발을 만들기 시작한 지는 40년이 훌쩍 넘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한지 공장에서는 우리의 한지발로 떠야 좋은 한지를 뜰 수가 있다. 지금은 중국에서 한지가 대량으로 수입되고 있다. 이에 많은 한지공장들이 타산이 맞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현재 남은 공장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한지발을 만드는 곳도 일감이 떨어지고 명맥마저 끊어지게 되었다.

 

             ​

한지발의 과거와 미래

전주 사람들은 전주 한지가 원주에 밀리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 사람들은 한지 살리기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세태 속에서도 유배근 명인은 전주 도심 한 켠에 둥지를 특고 40년간 한지 뜨는 발을 짜오고 있다. 

대량복제의 시대, 오롯이 수작업으로만 한지에 생명을 입혀온 유배근 명인은 장인이자 한지산업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다. 

그의 인생이 황혼이듯, 한지를 뜨는데 쓰는 한지 발도 황혼의 문에 기대어 있다. 중국산 종이가 물밀 듯 들어오면서 굳이 값비싼 한지를 찾지 않고도 쓰임을 충당할 수 있게 되었고, 국내 한지산업의 끝 모를 침체가 한지 발을 짜는 그에게까지 한숨을 던져줬다.

‘지천년 견오백’ 천년을 간다는 한지를 손수 뜬 적도 있다. 한 때는 전주시 동서학동에서 꽤 큰 한지 공장도 운영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 ‘유배지’라는 상호도 달은 적이 있다. 얼마나 견고하고 고왔던지 한지에 손을 뗀지 오래지난 후에도 콧대 센 인사동 사람들이 그의 종이를 기억해 줄 정도다.

한지 발과 함께해온 삶. 하지만 호황을 누리던 한지산업이 호된 시련에 부딪힌 뒤 이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직종이 되었다. 인건비조차 건질 수 없기 때문에 전수는 생각도 못한다. 유 명인의 작업은 요통을 앓고 있는 환갑이 넘은 아내와 함께 가내수공업식으로 겨우 명맥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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