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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故조충익
  • 종사분야
  • 선자장 / 태극선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제 제10호
  • 지정날짜
  • 1998.11.27
  • 주소
  • 전주시 완산구 동문길 60
  • 이메일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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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소개

조충익 선자장은 1950년 장수에서 태어났다.

 

명인으로 인정받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는 노점상을 하면서도 틈틈이 부채 장인들을 찾아다니 며 어깨 너머로 부채 제작 기술을 습득했다. 그러나 태극선을 그리는 기술을 익히기란 쉽지 않았다. 지 금은 컴퓨터를 이용해 오차 없이 태극선을 뽑아내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재단을 하다 보니 오차도 많았고 태극선이 맵시 있게 빠지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태극선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삼 태극 작도법을 고안해 낸다. 그가 만든 작도법은 당시 부채업계의 비공식 표준이 되었고, 제각각이던 태극의 모양과 비율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개막식, 한국 선수단은 조충익 명인의 태극선을 흔들며 입장했다. 조충익 선자장의 이름이 전 세계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우 리나라 선수들이 들고 입장한 태극선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의 태극선은 금선, 대금선, 파초선, 민 화선 등 20여 종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일반 부채보다 살이 3배나 많은 250살의 세미선은 태극선 제 118 전주 핸드메이드시티 특화 기반조사 결과보고서 작 기법의 극치로 평가받는다.

 

조충익 선자장은 ‘아름다운 전주부채’라는 이름으로 전시관을 마련해 대표 작품을 비롯해 그가 만든 부 채에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장식한 합작품과 외국 부채, 옛날 부채 등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는 그가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해 만든 폭 2002cm의 태극선과 높이가 2m80cm에 이르는 초대형 부채, 8000 여개의 댓살로 만든 공작 부채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48년 장수 출생

·태극의 모양과 비율을 통일한 삼태극 작도법 고안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개막식,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선수 입장에 조충 익 명인의 태극선이 사용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다수 입상했으며, 2003년 미국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 부채전과 2008년 전주단오 부채전 등의 전시

·현재 ‘아름다운 전주부채’ 전시관 운영 

라이프스토리

 

 

선자장으로 지정되다. 

도내 무형문화재 가운데 선자장(扇子부채)은 도합 2명뿐이다. 그 중에서도 조충익 명인은 유일한 태극선 기능보유자다.

선자장 조충익 명인의 태극선은 다른 태극선들이 양쪽에 베를 입혀 이중감을 주고 있는데 반하여, 이중감을 주지 않으며 3가지 색깔이 어울리도록 하는 태극무늬를 사용하는데 있다. 태극선은 다른 부채에 비해 공간의 면 분할 및 강한 색상대비 등이 두드러지며, 오랜 역사성과 그 전통에 맞게 우리 향토 민속공예로서 전승되고 있다.

조충익 명인은 접착력과 보존력이 좋은 풀을 스스로 개발하여 부채 모양이 뒤틀림이 없게 하며, 모양 또한 다양하고 매우 섬세하여 이 분야에서 예술성이 뛰어나다. 일반부채 보다 살이 3배나 많은 250살짜리 세미선은 태극선 제조기법의 극치이다. 1970년대 후반에 처음 부채 제작을 시작해서 멋진 부채 만들기에 집념을 불태워온 그의 부채는 또 하나의 명품(名品)이라 할 수 있다.

1998년 11월 27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10호 선자장(태극선)으로 지정되었다.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시작한 태극선을 평생업으로 삼다.

조충익 명인이 태극선에 손을 댄 것은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다. 그 전부터 여러 가지 공예를 해온 탓에 눈썰미와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전주 전통 부채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태극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늬이며 부채가 그냥 좋았던 것이다.

“옛날에는 그냥 먹고살려고 이것을 했제, 서른살에 태극선을 배우고 익히면서 고생 많이 혔어. 그때 당시에는 전주에 10여명 정도가 태극선을 했는데 이제는 두세 명 남았제. 집에서 몇 개씩 만들어다 팔고 그랬는데 돈이 안돼. 굶기도 많이 혔고...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는디 아직도 마찬가지인 것 같어. 무형문화재라는 것이 그렇게 큰 지원이나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고 혀서 말이여.”

늦게 시작한 공부가 더디 트인다는 말처럼 태극선을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집에서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보고 공부를 해보지만 부족한 것이 많았다. 태극문양을 그리면 모양새가 모두 다 틀리게 그려지기 일쑤였다. 이럴 때 그는 임성권 씨(작고)를 찾아가 의문점을 물어보고 하나씩 배워갔다.

임성권 씨는 태극선 제작자로서는 대선배격의 인물이다. 임씨의 자문을 구하기를 1년여가 지나 조 명인은 본격적으로 가내수공업식의 태극선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노점상 소년

조 명인은 1948년 3월 7일 장수군 번암면 사암리 출생이다.(호적에는 195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3남 5녀의 8남매 가운데 조 명인은 7번째로 막둥이 아들이었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사자소학 등 한문을 공부했다. 당시 조 명인의 아버지는 스스로 한자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겨울내내 새끼를 꼬는 동안에도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자 지도를 하셨다. 새벽닭이 두 번 울면 아버지는 이내 자식들을 깨워서 한자와 붓글씨 공부를 시키던 교육열이 높은 분이셨다. 

조 명인은 잔병치레가 많아 10살이 되어서야 국민학교를 입학할 수 있었는데 곧장 2학년으로 다녔다. 당시에는 주변에서 머리가 좋으니 학업을 잘 따라간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지나고 보니 건너뛰는 것이 기초를 부실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같았다. 20리길을 걸어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집에 오면 소 꼴베기,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이 지나서 조 명인은 혼자 전주로 나와 고서점에서 심부름을 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돈벌이를 위해 전주 시민극장 앞 도로변에서 옛 그림이나 인쇄된 명화를 파는 노점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노점상으로 10대와 20대를 보내면서 조 명인은 남원 부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조 명인은 전주 태극선 노점상을 시작했다. 이 때가 28세 때였다. 노점상을 하면서 조 명인은 값싼 부채를 사다가 그 위에 그림 연습을 하는 등 조금씩 부채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31살에 지금의 아내 김정순 여사를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한 이후로는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12,000원짜리 삯월세 단칸방에 아침끼니는 국수로 때우는 날이 많아졌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더욱 생활은 힘겨웠다. 조 명인은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고민하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가족의 생계를 생각하면 부채를 버리고 직장이라도 잡아야 했다. 그러나 고민의 순간마다 그를 잡은 것은 오로지 태극선에 대한 열정 하나였다.

김여사는 그때의 어려운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 양반헌테 월 5만원만 벌어다주면 소원이 없겠다허면서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친정에서 쌀 한가마니 가져오면 3개월을 넘게 먹었지요.”

거기에다 설상가상일까. 부채를 만드는 사람은 많고 판로는 적고, 제작자들이 서로 박리다매(薄利多賣)를 일삼자 먹고 살 길은 더욱 어려워져갔다. 조 명인은 ‘태극선다운 태극선을 만드는 것이 먼 장래에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자신과 아내를 다독거리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 태극선 연구의 길을 택하다.

조 명인은 나름대로 연구를 하면서 똑같은 모양의 ‘태극무늬’를 그릴 수 있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판단, 부채업계에서는 최초로 ‘3태극 작도법’을 개발했다. 태극문양 하나하나를 그려내 부채를 만들 때라 같은 크기의 부채라도 태극문양이 제각기 달랐고 그에 따라 상품의 질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아마 33살이었을 것이여.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라 어느 하나를 표본으로 삼아 태극문양을 그리면 다른 사람들도 그 본을 따라 그려서 부채를 만들었기 때문에 태극선이라도 각양각색 모양이 나왔제. 그런데 내가 작도법을 개발하자 똑같은 태극문양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제. 해서 나만 가지고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줬지.”

다른 제작자와 차별화전략은 조 명인의 절대적인 명제였다. 생계와 장인의 혼이 깃든 태극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였다. 이에 따라 세미선 등을 개발했고 조 명인의 솜씨는 전주 소년체전을 계기로 차츰 명성을 얻어갔다. 다른 제작업자는 하나씩 문을 닫아갔다.

 

- 세계로 나아가다.

조 명인의 태극선이 국제적인 상품으로 처음 선보인 것은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다. 한국대표 입장때 선수·임원단이 들고 나온 것은 바로 조 명인이 만든 태극선이다. 아름다운 부채에 놀란 아시아인들의 반응은 ‘원더풀’이었다. 이후 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지정 전국민속공예품 14곳 중 유일한 전북지역업체로 선정, 전파를 탄 ‘전주민속공예사’의 태극선은 한반도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갔다. 당시 대회조직위에 납품한 태극선은 40,000여개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물량은 지명도를 높이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 노력과 끈기로 만들어 내는 명품(名品)

조 명인의 작품은 90%가 관공서와 대기업의 홍보 판촉물로 납품되고 있다. 유일하게 전통을 고집하며 소재 또한 정통적인 것만 쓰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간 한국관광공사에 독점 납품을 비롯, 웬만한 국제적인 행사에 그의 태극선은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태극문양과 어우러진 부채의 실용성과 예술성이 가장 한국적인 상품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가 한 해 만드는 태극선은 7만여개 정도이다. 일년내내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여름 성수기에는 성수기대로 명절이 있는 날이면 명절의 외국인들의 선물로 나가기 때문이다. 추석이나 설이 더욱 바쁘다는 것이 조 명인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게 만들어도 공정시간이 있기 때문에 2-3일이 걸린다.

전주 풍남제에서 열린 국내 최초의 부채전시회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어 2001년 서울의 공평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장안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003년에는 하와이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전을 가진 바 있다. 조 명인은 1998년 ‘부채전’을 계기로 자신만의 작품을 틈틈이 준비하고 있다.

“작품은 시간을 쪼개 평상시에 만들고 있제. 지금가지 150여 개의 작품을 준비했고 살아 있는 동안 500여개의 작품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전주 전통 부채의 명맥을 보존하고 후세에 남겨주기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제. 500개의 작품을 전시하고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을 꾸준히 준비해오고 있기도 하고...”

조 명인은 전주 전통한옥지구인 교동에 50여평을 이미 구입해놓았다고 귀뜸해준다. 그가 꿈꾸는 개인전시관은 학습체험장, 수공예체험관, 전주부채박물관이다.

그의 공방 사방 벽면에는 그동안 만들어온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세계 최대크기인 너비 2.6m 세로 4m 자리에서부터 너비 2.5cm 크기의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150여점이 걸려 있는데 연꽃부채, 공작부채 등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공작부채는 공작깃털만 8,000여개가 소모되었다.

“아무리 칸트철학을 줄줄 읊는다 해도 내가 칸트가 될 순 없잖어. 중요한 건 창조지. 창조만이 비로소 나만의 세계를 완성해주거든.”

만나자마자 대뜸 작품관이 무어냐고 묻자 조 명인은 대답대신 창조성을 화두고 꺼냈다.

“예전에야 없어서는 안 될 생활용품이었지만 요즘은 어디 그런가, 바람을 부치던 기능은 잃은지 오래고 미적인 면을 강조한 공예품으로서 성격이 더 강하지. 이왕 시작한 거 부채공예의 맥을 잇고 좋은 작품 많이 남겼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창조와 변화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해.”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건만 여전히 식지 않은 창작열이 곧 그의 작품관임을 깨닫게 했다.

“요즘도 새벽 1시는 초저녁이여. 두세 시는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데 그래도 아침 6시 전에는 일어나. 문하생은 무슨 일 배운다고 왔다가 한달 버티기가 힘들어. 요즘같이 주 5일 근무다 법정근로시간이다 따지다보면 나는 악덕기업주인 셈이지. 지금까지 사실 양적인 면에 치중했지만 이제는 어디에 내놓아도 예술성을 인정받는 그런 작품을 만들 거야. 말년에 욕심이라면 내가 만든 작품을 한 곳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자료관을 하나 갖고 싶어. 아이들에게 부채 만드는 방법도 알려주고 말이야.”

참 소박한 꿈이다. 대부분의 장인들이 가업을 이어받은 것과는 달리 조 명인은 태극선의 아름다움에 빠져 스스로 발을 들여 놓았다. 평소 손재주가 좋아 관광상품으로 팔리는 미니병풍을 만들었던 조 명인은 78년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작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가업으로 부채를 이어오던 몇몇 장인들을 혹 기술이 새어나갈까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때부터 끝없는 자신과 싸움을 시작했다. 눈동냥, 귀동냥, 어깨 너머로 배운 부채 만드는 법. 그의 땀방울은 드디어 80년대 들어 결실을 맺었다.

“문화재 지정이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해야겠다고 생각헌 것이 바로 개인 박물관 건립이며 사회봉사헐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혔제. 결국은 내 작품에 정진하고 우리 전주부채의 명성을 길이 보존허는 것이 시급허다고 생각혔어. 또한 부채도 공예니까 현대적인 회화 기법을 도입혀서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가꾸는 것이 필요헌 일이여.”

조 명인의 전수자는 그의 큰아들 조계웅 씨이다. 그러나 딸 은실 양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조 명인이 귀뜸한다.​ 

 

 

조 명인은 “전통 공예를 배우러 오는 젊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온다고 하더라도 한 두달을 견디지 못허고 말지. 문화를 배우러 오는 것이 먼저여야지 되는디 젊은 사람들은 돈을 보고 오는 것같더라고...그러니 오래 버티지 못하는게 당연허지. 무형문화재도 이제는 열심히노력허고 연구허는 사람들헌테는 성과급같은 것을 줘서라도 열심히 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공예는 문화라서 절대 경제논리로는 안되제. 지정만 허고 관리나 지원이 잘 안 된다면 허나마나 아닌가? 예우 또한 필요허고...” 

조 명인은 현재 50여평의 자택에서 영세가내수공업 정도로 3여명의 종업원과 같이 태극선을 만들고 있지만 한국의 얼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의욕에 가득 차 있다. 연간 7만개 이상을 생산, 국내 유명백화점 및 관광공사 등 각종 업계에 납품하고 있는 조 명인은 전통이 살아 숨쉬는 민속공예품인 태극선 제작기술을 배우고 익히려는 사람이 적어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면서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 민속공예품 생산업체의 육성을 위해 공예품 전문생산 지정업체 선정에 그칠게 아니라 업체들의 건전한 육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현행보다 더 낮은 장기저리 재정지원과 전통문화계승 차원에서 실질적인 제도적 장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측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며 어려운 심정을 토로했다.

82,86년 아시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비롯해 각종 국제경기대회에서 우리 대표단의 심벌마크가 되다시피 한 태극무늬(빨강, 노랑, 파랑) 부채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주위에서는 돈도 많이 번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해요. 가치를 제대로 매겨주질 않고 ‘시장 상품’ 기준으로 평가하려고 해 속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명품이 명품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배려가 절실합니다.”

공방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해 밤늦게까지 계속된다. 일손 구하기도 쉽지 않고 젊은이들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수도 적을 뿐 아니라 비전이 없다며 한두 달도 안돼 떠난다. 작업을 도와주는 사람은 모두 부녀자들 뿐. 부인가지 덩달아 고생을 시켜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명품에 걸맞은 값은 쳐주지 않으면 팔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렇게라도 안 팔면 부채를 계속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1년에 만드는 태극선이 7만여 개.

태극선 하나에 들어가는 대나무 살은 평균 80-90개. 속살은 잘 휘어져 겉에서 두세 번 째 살을 쓴다. 손해를 보더라도 결코 속살은 쓰지 않는다. 무려 8,000여개의 가느다란 대살로 만든 공작선은 그가 만든 작품의 압권.

조 명인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일은 전통부채의 재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옛 부채도 찾아볼 수 없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지난 10여년 전 전주 풍남제 때 원형에 가깝게 재현한 작품들로 이기동 씨와 함께 ‘전통 전주 부채전’을 열기도 했다. 욕심이 있다면 ‘부채 박물관’을 마련, 부채의 모든 것을 재현해 후세에 물려주는 것이다.

조충익 명인은 한국관광공사가 전통문화의 관광 상품화를 위해 ‘인간문화재 작품 전시·판매장’을 개관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물론 이들의 합죽선과 태극선 작품도 전시돼 있다. 조충익 명인은 ‘이러한 공간이 상설 운영된다는 것 자체만으로 힘이 솟는다’면서 앞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활성화되기를 소망했다.​
 

 

 

- 자부심에서 비롯된 의욕을 불태운다.

민속 공예품 전주 태극선이 고베 유니버시아드, LA올림픽, 86·88올림픽을 비롯한 각종대회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공예품으로 외교의 큰 몫을 담당해 왔다. 활발해져가는 동구권과의 교역확대 등으로 국내 관광공사와 기업체들의 해외 PR 또는 선물용으로 전주 태극선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전주 20여개의 태극선 제조업계 중 유일하게 86·88올림픽 휘장업체로 지정받은 민속공예사 조충익 명인은 국내 태극선 제조업계의 1인자로, 이들 업계들로부터 주문받은 태극선 납품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내가 만든 태극선이 세계 곳곳에 한국을 대표하여 나간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쉴 새 없이 신기에 가까운 빠른 손놀림을 하고 있다. 조 명인이 공예품에 손댄지는 2007년에 이르러 30여년이 넘고 태극선을 만들기 시작한지도 25년이 됐지만 단 하루도 소홀함이 없이 멋들어진 전통 태극선 만들기에 집념을 불태워 왔다고 한다. 그가 30여 년 동안의 외길인생에서 가장 가슴 뿌듯했던 일은 LA올림픽, 86·88올림픽 등 국제 대회시 본인이 직접 만든 부채를 입장하는 선수단과 응원단이 세계를 향해 흔들었을 때이다. 이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면서 조 명인은 더욱더 조상의 얼이 깃든 전통 태극선을 만들기 위해 어느 한 곳 소홀함이 없이 부챗살 하나하나에도 온 정성을 쏟고 있다고 한다. 조씨가 만들고 있는 태극선의 종류는 대금선, 금선, 파초선 등 20여종이 넘고 일반 부채보다 살이 3배나 많은 세미선은 태극선 제조기법의 극치로 손꼽고 있으며, 특히 시중의 일반 부채를 보면 앙면에 베를 입혀 2중감을 주고 있지만 조씨의 부채는 2중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며 비결이다. 가격도 다양하고 종류도 크기도 각양각색이다.

조 명인은 1984년 전라북도 공예협동조합 이사, 1990년 전주 죽세 공예협동 소조합 이사, 1991년 전주 죽세 공예협동 소조합 감사, 1994년 전주 죽세 공예사업 협동조합 이사장, 1996년 전라북도 전승공예 연구회 부회장, 2000년 전주 공예사업 협동조합 이사장, 2001년 전라북도 전승공예 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받은 표창 및 감사패만 해도 1992년 7월 감사패(국제로타리 클럽), 1995년 7월 표창패(국제로타리 클럽), 1998년 8월 감사패(사단법인 전주 풍남제전 위원회), 2002년 4월 감사패(사단법인 2002월드컵 문화시민 협의회) 등 수없이 많다. 

1984년 12월 28일에는 공예품 전문 생산업체로 지정되었고, 1985년 7월 27일 제 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 기념품 생산업체 지정, 1985년 7월 27일 제10회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기념품 생산업체 지정, 1997년 4월 1일 향토(토산품 생산)업소 지정(광주 지방국세청), 1998년 4월 16일 월드컵관련 상품생산 유망기업 지정, 1998년 11월 27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태극선) 지정, 1999년 8월 1일 전통, 문화업소 지정(광주지방국세청), 2003년 5월 26일 전통업소 지정(광주지방국세청), 2003년 9월 정부조달청 문화상품으로 지정되는 등 그의 노력이 여러 사람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수상 경력 또한 다채롭다. 수상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1980년 8월 21일 제3회 전라북도 산업디자인 전람회 입선

- 1981년 12월 22일 제4회 전라북도 산업디자인 전람회 입선

- 1982년 7월 12일 제5회 전라북도 산업디자인 전람회 특선

- 1983년 8월 20일 제6회 전라북도 산업디자인 전람회 공예부분 우수상

- 1983년 9월 27일 제13회 88올림픽 상품개발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특선

- 1984년 7월 18일 제7회 전라북도 공예품경진대회 장려상

- 1984년 10월 12일 제1회 올림픽 기념품 전시회 및 제14회 전국공예품 경진대회 장려상

- 1985년 8월 5일 제1회 전라북도 우수공예품 디자인공모전 장려상

- 1985년 9월 7일 제2회 올림픽기념품 전시회 및 제15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 장려상

- 1986년 5월 6일 제9회 전라북도 공예품경진대회 최우수상 등 2000년까지 다수의 입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조충익 명인은 특이하게도 1996년 세계에서 가장 큰 부채(가로 2m 60cm)를 제작하는가 하면 1996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부채(가로 2.5cm)를 만들기도 했다. 1998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채살이 많은 공작부채(약 8,000여개의 부채살)를 제작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 부채를 탐낸 태국인의 친절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국제스포츠경기대회나 국제회의에서 입장할 때 들고 나오는 그 태극선. 그게 바로 내 작품이지. 전에는 명예도 없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품삯까지 적어서 이 일을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TV에서 내 부채가 나오면 뿌듯해지곤 하지.”

그가 만든 태극선은 태극기를 대신해 한국을 알리는 사절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한번은 태국여행을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부채를 들고 갔었다고 한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태국의 왕궁을 구경을 하고 나오니 신발이 없어져 당황하고 있었는데 그 때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그의 신발을 가지런히 보관했다 내어 주었다. 그러면서 부채를 하나 얻기를 청해서 흔쾌히 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부채가 꽤나 갖고 싶었던지 다른 사람들 신발은 밖에 어지럽게 널려있는데 내 신발을 깨끗이 보관했다가 주더라고.” 그에게는 선수단들이 들고 나오는 부채 못지 않게 뿌듯한 순간이었다. 

 

- 부채 전도사의 길을 걷다.

먹고 사는 일에 조금 여유를 찾고 부채 전도사를 자임했지만 여전히 부채에 대한 관심은 요원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전주가 부채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막상 보자고 하면 내놓을 게 뭐 있어요? 본질이 빠져있어요. 그런데도 지자체들은 냉랭해요. 더구나 요즘 축제 정체성에 발목잡혀 있는 경우가 좀 많아요. 부채만큼 정체성이 확실한 축제가 어디 있어요? 몇 해 전 이어령 전문화부장관도 말씀하셨듯, 전주는 부채축제가 필요합니다.”

10여년 째 부채축제 필요성을 주창해 왔지만 실현은 요원한 상태다. 대신에 장인이 선택한 것은 대형 부채전시회, 이런 일념은 그를 다시 동분서주하게 만들었다고 소개한다.

“끼워 넣는 전시 말고 부채의 세계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전시가 필요합니다. 이런 행사는 사실 지자체가 나서서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장인은 그저 작품이나 만들고 제공하면 될텐데, 혼자 나서서 모두 다 감당하려니 여간 어렵지 않네요.”

유명한 한지와 남부지방의 질 좋은 대나무는 전주를 고급부채의 원산지로 가능케 했다. 조선시대 전라감영에 있던 선자청은 고급부채를 만들었던 대표적 기관, 장인에게 이런 점은 전통을 보전하는 사명감에 다름 아니다.

“어렵더라도 먹고 사는 데만 열중하면 끼니갈망은 하겠죠. 하지만 나중에 남는 것이 없어요. 밥을 적게 먹더라도 영원히 남는 것을 선택할 밖에요. 장기적으로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삼습니다.”

후계자 문제도 장인들에겐 어려움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 자녀들이 도맡듯 조씨도 장남 조계웅 씨에 이어 문화재 관리학과를 전공한 장녀 조은실 씨가 수업 중이다. 

후계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목청을 돋운다. 지자체가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대학과의 연계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대학은 학생들이 넘치잖아요. 대학에 과를 만들고 이론과 현장학습을 병행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미뤄지다 보면 전통은 1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천덕꾸러기를 벗어나지 못해요.”

부채 사랑이 곧 나라사랑이 돼 버린 장인의 열정이다.

장수군 번암면 산골 출신이었던 그에게 손재주는 큰 자산이었다. 처음엔 관광 상품용 미니병풍을 만들었고, 이듬해 부채로 관심을 돌린 것이 바로 숙명이 됐다.

30대에 맺은 인연은 그를 30여 년 째 ‘바람 만드는 이’로 살게 했다. 이는 다시 ‘태극선의 달인’이라는 칭호를 선사하기에 이르렀고, 2003년에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서 열린 ‘미주한인 100주년 기념행사’에 작품을 선보이는 영예를 안게도 했다.

조씨 부채의 특징은 회화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옛날에도 연엽선, 연화선, 공작선, 오엽선 등 실물형태를 살린 부채는 제작돼 왔지만, 대나무 살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내는 독특한 작품성은 그만의 자랑거리이다. 최근엔 전등갓 제작에도 손을 댔고, 모기업과 컨소시엄을 이뤄 이미 성공단계에 접어들었다.

‘바람을 만드는 이’, ‘태극선의 달인’, 이렇듯 거창한 찬사가 따라다님에도 장인의 삶은 여전히 상품과 작품사이를 줄타기하느라 아슬아슬하다.

 

이렇게 작업한다.

작품 1점을 제작하는 데는 1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까지 걸린다. 작품에 쓰이는 대나무는 둥글게 깎아 만들어 부챗살로 쓴다. 일반적인 태극선은 공장에서 빼오는 각진 댓살을 쓴다.

조 명인은 재료부터 한국의 것을 쓴다. 부챗살로 쓰는 대나무는 철저하게 2년생을 겨울철에 잘라 사용한다. 대나무 구입 장소는 전남 구례, 진주 등에서 가져온다. 한지는 전주 한지만을 고집한다.

태극선 제작순서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대나무 다듬기-2년생을 겨울철에 베어 사용. 단단하고 물기가 없어 좋다.

② 부챗살 만들기-대나무를 쪽을 내고 포를 뜬다. 약 1mm 굵기로 쪼개어 다듬는다. 음지에서 건조한다. 부채 한 개에 90개의 살이 필요하다.

③ 삼태극 문양 오리기-부챗살이 완성된 후 살을 노루지에 붙인다. 노루지 위에 태극문양 비단이나 한지를 덧바른다.

④ 답선 하기-부챗살에 양쪽을 도배하고 압축을 한 다음 음지에서 말린다(음건). 하루정도 천천히 말린다. 찢어짐과 곰팡이를 방지하기 위해 음지에 천천히 말린다.

⑤ 도련하기-부챗살과 태극문양을 부채모양으로 도려낸다.

⑥ 선지 두르기-태극선 맨 끝부분을 감싸주는 것.

⑦ 손잡이 끼우기

⑧ 사복하기-손잡이를 끼우고 못을 박는 일​ 

 

 

30년 이상 부채 제작에 전념해 온 그는 서울 올림픽, 아시안 게임 등 각종 국제경기대회에서 홍보용 태극부채를 도맡아 제작했다.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 당시에는 200cm가 넘는 대형 부채를 만들었다.

조씨가 제작한 부채에는 개당 300여 개의 대나뭇살이 들어간 부채도 있다. 그는 ‘부채의 고장 전주에서 자란 것이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라며 현재 딸 은실에게 부채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이 외에도 조 명인의 부채는 다양하다. 드림부채, 곱장선, 발부채 등을 들 수 있다. 드림부채는 방아실 부채라고도 하는데 모습은 효자선과 비슷하다. 이 부채는 선면의 위쪽이 넓고 아래쪽은 접부채처럼 좁으며 선면의 길이가 길어 오리발을 연상케 한다. 드림부채는 용도가 곡식을 위한 것으로 곡식 낱알 속의 잡티를 날리는데 사용한다.

곱장선은 선면의 댓살머리가 휜 부채를 곡두선이라 한다면, 이렇게 댓살 사이사이에 휘어놓은 댓살을 장식한 부채는 곱장선이라고 부른다. 곱장선은 댓살은 성글지만 화려하게 꾸며 배치한 부채라는 특성이 있다. 선면모습은 화려한 댓살 장식 덕분에 마치 공작새가 꼬리를 활짝 편 모습처럼 보인다.

조 명인이 부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78년부터이다. 30년이 넘도록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멋들어진 부채 만들기에 집념을 불태워 온 조충익 명인의 부채는 보는 이들에게 장인정신이 만들어 낸 명품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조 명인의 태극선 만들기는 좋은 대나무를 손에 쥐면서부터 시작한다. 죽순이 돋은 신죽(新竹)을 그 다음해 서리까지 기다려 대나무를 얻으면 부챗살을 만드는 포뜨기 작업에 들어간다. 1mm에서 어떤 건 0.8mm까지 일정한 규격의 부챗살을 만드는 작업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이어 포를 뜬 대나무를 각이 지게 깎고 나면 비로소 부채지(紙)에 올려 풀을 먹인다. 그런 다음 응달에 걸고 풀이 마르기를 기다려 태극문양을 붙인다. 이처럼 부채를 만드는 공정은 서두르고 싶어도 서두를 수 없는 정교함과 인내를 요구한다.

조충익 씨가 만드는 태극선의 종류는 금선, 대금선, 파초선, 민화선 등 20여종에 이르며 일반부채보다 살이 3배나 많은 250살짜리 세미선은 태극선 제조기법의 극치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살아 숨쉬는 부채 20여종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한국의 부채 홍보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가 만드는 태극선의 특징은 다른 태극선들이 양쪽에 베를 입혀 2중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2중감을 주지 않으며, 3가지 색깔이 어울리도록 하는 태극무늬를 사용하는 데 있다. 

부채는 대나무화 한지가 주재료이지만 고급부채는 한지 대신 비단을 쓰기도 한다. 대나무는 2년 이상 자란 왕대를 사용하는 데 서리가 내려 성장이 완전히 멈춘 것을 베야한다. 그래야 물기가 없어 곰팡이나 좀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대는 남쪽지방의 것이 좋은데 담양, 순천, 진주 등에서 나는 것이 마디가 길고 좋다. 부채는 왕대를 가로와 세로 길이를 1mm정도로 잘게 쪼개서 살을 만드는데 겉대와 속대는 버리고 가운데 것만 쓴다. 

부채살은 조개지라는 조개모양의 종이로 고정을 시키고 보름 이상 물에 불린 밀가루로 풀을 쒀 도배를 한다. 종이를 붙인 후에는 접착이 고르게 되도록 모포 속에 부채를 넣고 발로 밟거나 압력을 가한 후 음지에서 하루이상 건조시킨다. 꼬박 2-3일이 걸려야 하나의 부채가 완성된다.

“부채는 대나무와 종이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예술품이지요. 하찮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제각기 특징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살아 숨쉬는 부채가 올해부터 한국의 바람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방구부채의 과거와 미래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 무더운 여름철에는 꼭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부채였다. 그래서 여름철을 앞두고 부채공방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절이 있었다. 

부채에는 여러 쓰임새가 있다. 그 첫째는 의식이나 의례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왕의 행렬시에는 대형 파초선이 쓰이고, 혼례시에는 신부가 혼례선, 신랑은 파란색 차면선을 사용한다. 무당이 굿을 할 때는 무당부채가 쓰였다.

둘째는 신분표시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양반들이 사용한 접부채나 귀족의 권위와 신분을 상징한 깃털 부채가 그것이다. 셋째는 의사표현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부채를 접어 거꾸로 들고 있으면 마음을 돌리라는 표시이며 부채를 반쯤 펴 코 아래를 가리고 있으면 마음은 가지만 허락할 단계는 아니라는 표시로 ‘부채말’이라고 한다.

넷째는 가무나 놀이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판소리, 부채춤, 줄타기 등에 쓰이는 부채가 이에 속한다. 다섯째는 생활 또는 계절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대륜선이나 곡식과 낱알 속의 잡티를 고르는 듸림부채 등이 그것이다.

여섯째는 절기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단오에 부채를 선물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단오선(端午扇, 勿忘扇이라고도 한다.)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더위를 물리치고 벌레를 쫓는 등 부채의 용도는 다양하다.

부채는 왕대나무와 닥나무로 만든 한지로 제작했는데 남부지방이 대나무가 춤이 길게 잘 자라고 질이 좋아 전남 담양, 나주, 전북 전주, 남원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부채의 모양새도 제각기 달라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의 부채가 만들어졌다. 

부채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접었다 폈다 하는 접부채가 있고 또 하나는 손잡이가 고정되어 있는 방구 부채가 있다. 접부채는 몸에 지니고 다니기가 편한 반면 모양새는 그리 많지 않다. 접부채 중에 대나무 속살로 만든 가격이 저렴한 것은 담양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었고 대나무 겉대로 만든 고급부채는 전주 합죽선이다. 대나무 껍질을 얇게 깎아서 양쪽에 붙여 만든 부채는 이 지구상에서 합죽선 밖에 없다.

방구부채는 종류도 많다. 오동나무 잎을 본떠 만든 오엽선, 연잎을 본떠 만든 연엽선, 태극 무늬를 오려붙인 태극선,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기도 하다.

 

예로부터 전주에는 질 좋은 한지가 많이 생산되어 남부지방의 대나무와 어우러져 선자청(扇子聽)을 전주에 두고 전국 각지로 공급하였으며 단오절에는 단오선이라 하여 임금님께서 신하들에게 선물로 하사하였다 한다. 무더운 여름날 몸을 식히는 도구로 또 모기를 쫓는 도구로 쓰이고 불을 지피는 데도 쓰이고 서예인들이 선면에 묵향을 듬뿍 담기도 하고 화가들은 천태만상의 그림을 그려 사랑을 받아왔다. 

세상이 변하고 기계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선풍기나 에어컨이 많이 보급되면서 이제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로써 기능을 다하고 각 지방에서 명성을 날렸던 공방들은 생활의 터전을 뒤로 하고 거의가 문을 닫게 되었다. 요즘 스포츠 경기장에 가보면 부채질을 하기는 하는데 대다수가 PVC로 만든 부채 일색이고 가뭄에 콩 나듯 대나무 부채가 보이기는 한데 그나마 동남아 지역에서 들여온 값싼 부채들이다. 이제 명맥을 이어가는 곳은 전주 지방의 태극선, 합죽선, 남원지방의 미선(쌍죽선), 충청도 어느 지역의 공작 부채 등이며 그 외에는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 생산되지 않는 부채는 박물관, 도는 골동품점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부채를 오래 쓰면 많이 훼손되기 마련이다. 훼손되어 못쓰게 된 부채는 태워 없애는 게 풍습이었다. 그래서 다른 유품에 비해서 귀하다. 태극선은 우리 고유의 삼태극 무늬가 있어서 그나마 우리나라를 알리는 데 선물용이나 홍보용으로 조금 쓰이고 국제 스포츠 경기 때 조금이나마 국위선양을 하기도 한다. 

합죽선이나 미선 등은 서예가나 화가들에게 조금 쓰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부채를 만들어 수익을 내서 생활을 꾸려가기는 매우 힘들다. 요즘 젊은이들은 배우려 하는 사람이 없어 맥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속된 말로 요즘 휴대전화 벨소리 잘 개발하면 천문학의 거액이 오가는 세상이다. 부채 만드는 것 열심히 땀흘려 해봤자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아무리 배워 보라고 설명한들 공염불에 불과하다.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뿐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생활문화에 의해 우리 민족의 체취와 멋 그리고 격조 높은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 옛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서운한 일이지만 이제 생활문화는 서구적이고 물질적으로 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름이면 에어콘과 선풍기보다 더 아름답고 정겨움과 사랑을 받아온 것이 바로 부채다. 할머니의 위엄과 사랑의 바람을 일게 했고, 고단한 삶을 달래시던 아버지의 놀이개, 어린 자식들 치다꺼리고 바쁜 시간을 조개시던 어머니의 친구였던 것이 부채인 셈이다.

부채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문화의 한복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람을 일으켜 청량감을 취하려했던 단순한 부채의 쇠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크기와 높이에 있어서 자리하고 있는 부채는 우리민족의 자존심 이상의 문화유산이다.

‘한국인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닌다’라는 외국인의 설명처럼 우리의 부채는 바로 우리들의 몸이며, 마음이며, 정으로 살아온 생활품이다. 또 판소리 명창의 걸쭉한 소리한마당에도 부채는 빠질 수 없는 여유이자 예술세계의 중심부다.

“단옷날에는 임금이 재상은 물론 말직에 있는 궁인들에게까지 부채를 선물했습니다. 이런 부채를 당오진선이라 했지요. 그리고 일반인들도 부채를 많이 선물해서 부녀자들이 주로 쓰는 부채를 단오선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오도 전 같지 않은데다 부채를 선물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어요.”

부채는 나주, 담양, 남원, 전주 등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남부에는 부채의 재료가 되는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인데, 담양의 접부채, 남원의 광고선, 미선, 쌍죽선, 전주의 합죽선, 태극선은 가히 그 유명세가 조선 팔도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전주에서 만든 합죽선과 태극선을 으뜸으로 쳐주었는데 그것은 전주의 한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고급부채를 수집하고 공급하는 선자청이란 기관을 전주에 두고 팔도의 부채며, 임금에게 진상할 부채의 수급을 맡았다.

그런만큼 전주의 합죽선과 태극선은 우리의 얼굴이며, 고유자산으로 천년의 얼이 담긴 자랑스런 예술품이다. 전주부채의 유명세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조때에는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고 부채를 만들어 왕실에 진상하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보급시켰다는 우리의 부채는 크게 방구부채와 접부채로 나눌 수 있다. 방구부채란 부채살에 갑사나 비단 또는 종이를 붙여 둥근 형태의 부채이며, 접부채란 접는 부채로 이것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부채살에 종이를 붙여 만든 것이다.

방구부채의 최고 명품은 태극선이며, 접부채의 최고봉은 바로 합죽선일 것이다. 이제 새 생활문화에 의해 단순한 바람을 일으켜야 했던 부채는 그 자리를 에어콘과 선풍기에 내주었다. 부채는 이제 호사가들이나 찾는 물품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주, 담양의 부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그나마 남원과 전주에서만 부채를 만드는 장인이 몇 명 있을 분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 생활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부채. 80년대 전주에는 10여개 업체가 있었지만 수지가 안 맞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제대로 된 부채는 ‘애호가’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해왔다.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부채들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른바 ‘공장 부채’들이 주류이다. 부채의 멋스러움은 볼 수 없고 ‘광고 문구’만 있다.

그러나 부채는 여전히 한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이다. 방한한 영국 여왕도 합죽선을 선물받았다. 각종 국제경기대회에서는 태극선이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 물결을 수놓는다. 선물받은 부채를 들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 외국 관광객들의 모습. 이들의 눈에는 한국이 ‘부채의 본고장’으로 비쳐질 만도 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제대로 품격을 갖춘 부채를 구하기 어렵다.

고려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해 금세기까지 사랑받아 온 부채이다. ‘부채의 실종’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들은 ‘부채의 수명은 끝나지 않았다’면서 우리 전통문화의 계승 차원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바람을 만들어주는 부채의 역할은 사라졌다고 해도 전통공예품 차원에서 개발·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주 풍남제전위원회 류장우 사무국장은 ‘부채를 문화상품의 하나로 찾게 하자면 우선 관심을 끌 만한 독창성과 멋스러움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먼저 ‘싸구려 문화상품’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장인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영세한 공방에서 일률적인 모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을 벗어날 수 있어요. 밥 먹기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명품’은 나오지만 전통문화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안동대 임재해 교수(민속학)은 “굿 줄타기에 쓰이는 부채나, 부채 속에 창조된 시화와 서화는 우리의 문학사와 미술사를 풍부하게 했다”며 부채의 팔덕(八德扇)을 소개했다. 이도령 앞에서 부채로 얼굴을 가려 춘향이의 수줍음을 나타내기도 했고, 부채를 접어 휘두르면 암행어사 출두를 알리는 육모방망이가 되기도 했다. 부채의 멋과 문화적 쓰임새에도 불구하고 한갓 더위를 쫓는 도구로만 생각된 탓에 일상생활에서 밀려났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풍류’를 상징하는 친근한 문화상품으로는 부채가 제격이다.

특히 한국인의 심성과 여유로움이 고스란히 반영된 부채는 한국의 미 가운데에서도 선(線)과 색(色), 그리고 넉넉한 마음까지 담아내고 있는 한국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다. 이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쉽게 만날 수 있는 부채지만 애정 어린 시각이 없는 한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공예품으로 생각할지 모른다는 지적은 부채의 운명을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제는 부채 만드는 것을 경제 산업으로 보지 말고, 문화예술로 분류해서 적극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경제가 부흥해서 잘 먹고 살기도 해야겠지만 문화예술도 발전되어서 마음도 살쪄야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닐까? 어느 큰 스님께서 부채에 글을 이렇게 써 주셨다.

德風常淸凉

좋은 부채 하나들고 시원하게 부채질하면서 우리의 것이 소중한 것을 음미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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