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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 성명
  • 최동식
  • 종사분야
  • 악기장 / 거문고
  • 지정번호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 지정날짜
  • 2000.07.07
  • 주소
  • 전주시 완산구 유기전2길 10
  • 이메일
  • Byc0655@naver.com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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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소개

악기장 최동식 명인은 1940년 장수에서 태어났다. 그의 스승은 악기 제작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국 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김광주 선생이다.

 

제2장 조사결과 요약 109 그는 전주시 태평동에 위치한 김광주 선생의 공방을 드나들며 어깨너머로 악기 만드는 걸 보았다. 그 러다 1964년 처삼촌 조정삼에게 본격적으로 가야금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운 좋게 서울에 있 는 김광주 선생의 삼청동 공방에 취직하게 됐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금세 악기 제작하는 방법을 익혔고, 스승이 만든 울림통을 하루에도 몇 십번씩 들여다보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던 그는 마침내 온 몸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법을 터득했다. 백악지장(百樂之丈). 여러 음악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거문고. 그만큼 연주하기도, 또 악기를 제작하기도 어렵고 까다롭다. 최동식 명인은 악기의 소리를 결정하는 것은 재료라고 믿는다. 전통기 법으로 제작한 그의 거문고는 상대적으로 무거운 편이고 줄도 누렇고 나무판도 옹이가 져있지만, 기 계의 힘을 빌려 예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신쾌동, 김소희, 전재환, 한갑득, 박귀희, 강동일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명인들은 그의 실력 을 알아보았고, 오늘날에도 김무길, 김재형, 변성금 등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거문고 연주자들이 최 동식 명인의 악기를 고집한다.

 

·1940년 장수 출생

·2000년 무형문화재 악기장 거문고 보유자 지정

·전라북도공예품경진대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 전승공예대전 수상

·전국국악기능보존회장, 전북전통공예인협회 회장 역임

·현재 궁성국악사 운영 

라이프스토리



소목장으로 지정되다.

최동식 명장은 거문고 제작기술의 발생지인 예향의 도시 전주에서 억척스러울만큼 향토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는 전통국악기 제작기법을 40년동안 고수하면서 우리나라 전통국악기 거문고를 원형대로 제작하는데 힘써온 장인으로 전통국악기의 대표적인 현악기 중에서도 거문고, 산조가야금, 정악가야금, 아쟁, 해금, 금, 슬 등을 제작하고 있다. 또한 전국 및 전라북도 공예품경진대회에서 다수 수상했으며 국악의 도시 전주를 홍보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국악기 제작 면에서는 전북 지방의 고 김광주 선생과 고(故) 김붕기 선생이 크게 활약했었고, 중요무형문화재 악기장은 42호(가야금)로 지정돼 있으며, 서울에서 활동하고 계신 이영수 선생과 고흥곤 선생 그리고 광주광역시의 이춘봉 선생과 고수환 선생이 가야금 제작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거문고 제작 전승자로는 최동식 명장이 있다. 최 선생은 거문고 제작 부문에 있어 국내에서 유일한 무형문화재다.

 

최동식 선생이 만드는 악기의 특징 

거문고는 왕산악에 의하여 7현금의 법제를 고쳐 만들고, 겸하여 곡을 지어 탔다는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한국음악에 큰 역할과 음악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지고 있다.

최동식 명장의 혼이 담긴 거문고는 질 좋은 오동나무로 공명통을 만들고 뒷단은 밤나무로 제작된다. 그의 제작법은 우리 선조들이 해오던 방법 그대로를 따르고 있다. 소리를 결정하는 70%는 재료라고 일컬어진다. 그러한 이유로 최 명장은 신품종 대신 재래종을 주 재료로 쓴다. 무주, 진안, 장수 지역이나 임실 운암 골짜기에서 수집한 오동나무로 거문고는 만들어진다.

 

국악기 만들기 외길인생

‘금슬(琴瑟)이 좋다’에서 금슬은 우리 전통 국악기인 ‘가야금’과 ‘비파’를 일컫는다. 여기서 가야금은 여성의 소리를 닮았다 하여 여자를, 비파는 굵직한 남성미를 담고 있어 남자를 상징한다.

결국 금과 슬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 금슬 좋은 부부도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 국악기에는 우리민족의 예술정신 뿐만 아니라 해학과 풍자가 담겨 있다. 

25살이 되던 해 거문고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는 최동식 명장의 손 마디마디엔 군살이 가득하다. 

“우리의 전통 국악기로 대표되는 것은 단연 가야금과 거문고입니다. 그 곡조가 애절하게 흐르면서 뭇사람의 심금을 흔드는 가야금이 여성적이라면 거문고는 음색이 깊고 남성적이어서 예로부터 선비들 사이에서 백악지장(百樂之丈)으로 숭상되기도 했습니다.”

최동식 명장이 말하는 거문고는 예부터 학문을 닦는 선비들이 타는 것으로 악기 중에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전통에서인지 몰라도 현재까지 거문고는 고고한 악기로 평가받고 있다. 가야금이 맑고 가벼운 소리인 반면 거문고는 낮고 굵은 소리가 난다. 술대를 쥐는 부분과 농현하는 손가락 끝에 굳은 살이 박히게 마련이지만 그 음색은 남성적인 매력을 한껏 자아낸다.

특히 거문고는 음역도 넓어 3옥타브를 넘나들며 조율하기가 가야금보다 수월하다. 최 명인은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으로 오늘도 그것과 씨름하고 있다.

선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지난 2000년 7월.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궁성국악사가 전통 국악기의 본산이라는 자부심으로 40년 넘게 국악기 제작에 힘쓰고 있다. 최동식 명인은 전주에서 거문고 제작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전통 국악기 중 대표적인 현악기인 거문고를 비롯해 산조가야금, 정악가야금, 아쟁, 해금, 금, 슬 등을 제작하는 한편, 국악기 제작을 아들 병용 씨에게 전수하고 있다.

거문고 제작 과정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재료는 돌 위에서 말라 죽은 오동나무다.

“석상오동(石上梧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돌 위의 오동나무를 이르는 말입니다. 돌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랐으니 얼마나 수난을 겪었겠습니까?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공명통을 만드는 데 쓰는 재료가 바로 오동나무입니다. 악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이 돌밭 사이에서 강인하게 자란 오동, 그 중에서도 산중의 폭포바위 위에서 자란 것을 제일로 치고 있습니다.”

수백년 묵은 소나무로 제작된 거문고에서부터 소뼈를 일일이 덧댄 가야금, 자개로 수 놓아진 거문고, 금과 슬 등이 40년 넘게 지켜온 소리인생을 엿보게 했다. 

하지만 국악사에도 수년전부터 불경이 바람이 일어 매달 2개의 거문고만 만들어내고 있지만 수요가 거의 없어 재고가 쌓이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홍보를 위해 선생은 홈페이지(http://myhome.naver.com/koogak)를 개설·운영 중이다. 

“저 자신부터가 시대에 걸맞은 대외 홍보 매체인 인터넷에 발 맞춰야 할 것 같아 가상공간에 아담한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전통 공예가 한 차원 더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홈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아들 병용 씨에게 거문고 제작을 대물림 중인 최동식 명인. 여름 더위,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악기 제작 및 전수에 안간힘으로 쓰고 있다. 요즘 바람은 그동안 만든 악기들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주고 그 소리의 올곧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최 명인은 악기 전시회를 여는 것이 꿈이다. 

술대로 줄을 치거나 떠서 연주하는 악기로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재상 왕산악(王山岳)이 중국의 칠현금(七絃琴)을 고쳐 만들어 곡을 지어 연주하니 학(鶴)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 하여 현학금(玄鶴琴)이라 하였다가 후에 현금이라 불렀다.

거문고는 윗판은 오동나무, 밑판은 밤나무를 사용하여 공명통(共鳴筒)을 만들고, 그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6줄을 걸치고 해죽(海竹)으로 만든 술대로 연주한다. 

최동식 명인은 전통국악기를 축소 제작 상품화하여 일반국민 및 관광객에게 전통국악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상품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미니 현악기 세트(80×15) (거문고, 가야금)

2. 미니 거문고 가야금 사물놀이 세트(80×55) (액자 제작용)

3. 국악 현악기 4종세트(30×10) (가야금, 거문고, 아쟁, 정악가야금)​ 

 

 

 

눅눅한 세월의 냄새가 풍겨나는 크지 않은 세 개의 방에는 국악기들로 가득하다. 크고 작은 형태의 금들은 줄을 매거나 아직 매지 않은 모습으로 방 벽을 따라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어른 키를 넘는 대형 금에서부터 아이들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꼬마 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쟁에서 단소에 이르기가지 다양한 형태와 모습의 악기들이 방 이곳저곳의 공간을 나누어 차지한 채 사이좋게 어울려 있다.

“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64년경입니다. 군대를 제대한 후 서울 처삼촌의 작업장에서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최 명인의 나이가 25세. 100년 가는 금줄을 만든다는 김명칠 장인의 아들 김광주 선생이 이웃해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는 얼마 뒤 전주로 내려와 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가야금과 거문고는 전문국악인들만이 사용하던 악기였다. 당시 악기값이 3000-5000원. 비싼 것은 1만원을 호가했고, 최상급은 1만 5000원선에 달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액수의 정도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당시의 유명 국악인들이 그가 만든 금을 애용했다. 그는 일일이 수공업으로 제작한 금을 직접 싸들고 사용자에게 건네주었다. 서울 같은 경우는 밤 11시 30분경 차를 타고 상경해 새벽 4시 반경 도착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하던 국악기는 75년 무렵부터 수요가 급증했다. 각급 학교에서 국악을 가르치면서 악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탓이었다. 그는 납품을 위해 3-4개의 금을 짊어지고 전국의 학교를 다 돌아다녔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가야금과 거문고는 2000여대 이상. 수요가 많았던 84년 한 해에만 300여대를 만들었다.

최 명인은 금을 만들면서 우리 오동만을 고집했다. 우리나라 오동은 결이 촘촘하고 단단해서 소리가 맑고 깊은 탓이었다. 예부터 딸을 낳으면 혼수준비로 심었다는 오동나무는 빨리 자라면서도 강해서 쉽게 불에 타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뎌냈다. 전북 장수와 구의계곡 등에서 구해온 오동나무를 최 명인은 다시 3-5년씩 비와 바람, 눈 속에서 말렸다. 모진 세월을 견딘 오동일수로 그 울림이 맑고 아름다웠다.

그런 오동을 깎고 파내고 다듬어 울림통을 만들고 거기에 줄을 매는 작업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소나무 방망이에 감은 명주실을 다시 물에 넣어 풀어내는 일은 특히 겨울이면 손을 부스러뜨리는 듯한 고통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견뎌냈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오동나무를 닮아갔다. 환경이 척박해 쉽게 성장할 수 없었던 오동나무가 온갖 시련 속에서 더욱 강인해지고 단단해져 강하고 맑은 소리를 울려내듯, 그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장인으로서의 기량을 단단하게 다져왔다.​

 

 

 

그런 외로운 길의 끝에서 그는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경제적인 궁핍을 견뎌내며 소리를 따라가는 외길 인생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세월”이었다.

명인 최동식 선생은 현재 거문고 제작 분야의 명인으로 문화재 반열에 올라있으나 실제로는 가야금, 아쟁, 해금, 비파 등 우리나라 전통 현악기라면 어느 것이나 그의 정교한 손끝을 떠나는 순간 하나의 예술품으로 탄생한다. 지난 40여년동안 겨우 서너평 남짓의 손바닥만한 공방(작업장)에서 심신을 내맡기고 오로지 낡은 연장, 흐르는 세월과 씨름하며 우리의 전통 현악기를 제작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공방엔 최 명인의 혼을 떠난 수종의 현악기들마다 제각각의 소리를 감추고 늘어서 있는 폼이 마치 ‘묵은 장맛’과도 같다. 방안에도 예외는 아니다. 명품이 명 연주자를 만나지 못했는지, 아니면 시대가 변해버린 것인지 예전같이 찾는 이가 별로 없다.

요즘처럼 기계음이 판을 치고, 진짜보다 더 그럴싸한 공장제품이 대량으로 쏟아지기 전까지만 해도 최 명인은 악기 제작만으로도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하나의 작품을 아예 수년씩 묵히기가 일쑤다.

올곧은 장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마다 더러 고뇌하는 것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과연 옛 건만을 언제까지 고집할 것이냐, 아니면 변화된 시대의 흐름에 섞이고 말 것이냐’하는 것이다. 문화재로 품격이 향상된 명인들일수록 그런 갈등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명예는 얼마나 얻었는지 모를지언정, 도대체 무늬만 문화재일 뿐이지 현실에서 느끼는 괴리감이라는 게 너무 크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모질게 춥고 배고파하며 괄시받던 시절 다 견뎌내고 일정한 반열에 들어서고 나니 이제는 ‘생업’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최 명인도 한때는 먹고살기가 막막해 직업을 바꾸겠다며 운전을 배우기도 했고, 멀리 외국으로 막일을 떠날까 생각도 한 적이 있었으나 선배들의 만류로 뜻을 접기도 했다.​ 

 


 

국악 찬양의 소망

고독한 외길 인생에서 그의 삶을 지탱해 준 든든한 버팀목은 신앙이었다. 10대 때 처음 신앙을 접한 그에게는 시작이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서당훈장의 아들로 교회에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가족과 불화하면서도 그는 부흥사경회가 열리면 10리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60이 넘은 나이에 아들에게 신장을 이식해주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을 때 그는 담담했다. 단단한 믿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던 탓이다. 수술대 위에서 너무도 평온한 그를 보고 오히려 간호사들이 신기해했다. 떠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예수님을 믿으면 편안합니다”고 대답했다.

그런 그가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소망은 바로 국악찬양단. 진정한 우리의 소리와 악기로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일이다. 그동안 몇 번 교회에서 시도를 했지만 목회자들의 반응이 특히 냉담했다. 진정한 우리의 소리지만 우리의 것이 오히려 더 낯설고 어색한 시절이 그로서는 못내 아쉽고 섭섭하다.

이런 그의 생각에 공감하고 호응하는 이들도 있지만 국악찬양단을 만든다는 일이 아직은 힘에 벅차는 일이다. 경제적인 여건과 사람, 애정과 노력, 그리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긴 시간 금을 만들어오며 맑고 아름다운 소리는 많은 시련을 거치며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깊은 소리로 찬양을 하는 일이 더 의미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거문고는 저의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거문고는 최동식이고 최동식은 거문고라고 말입니다.”

최동식 명인은 거문고, 가야금, 슬, 금, 아쟁, 해금, 양금 등 우리의 현악기를 모두 만들어내고 있는데 악기마다 독특한 맛이 다르다. 

“참 옛날 얘깁니다만 서울에서 악기를 열대여섯대 제작하라고 주문이 오면 돈이 없으니가 달라돈을 내가지고 어떻게든 만들어서 예전에 전주역이 지금 시청자리에 있었는데 그 전주역에서 중급행이라는 기차를 밤 11시반에 타고 올라갑니다. 서울역에 내리면 새벽 5시반. 겨울에는 그 시간에 내리면 컴컴한데 옛날에 시발택시라고 있었지만 그걸 탈 돈도 없고 시내버스를 타게 되면 출퇴근시간이 닥치니까 미어터지죠. 그래도 그때는 젊으니까 서울역에다 두 덩거리 맡겨 놓고 어깨에다 두 덩거리를 메고 종로 2가, 3가를 찾아갑니다. 지금이야 서울하면 다 외우고 있습니다만 종로 2가를 찾아가려면 서울역으로 나왔다가 서울역에서 종로 2가를 찾아가고 또 종로 3가를 찾아가려면 서울역으로 나왔다가 종로 3가를 찾아가고 사실은 가까운 길이 있는데 그렇게 멍청하게 찾아다녔습니다.

지금은 작고를 하셨습니다만 서울에 계셨던 신쾌동 씨, 김소희 씨, 전재환 씨, 한갑득 씨, 박귀희 씨, 전주의 강동일 씨, 부산의 김차남 씨, 광주의 김추란 씨등 이런 분들이 제 악기를 많이 팔아주셨어요. 그렇게 악기 판 돈을 가지고 전주에 내려와서 달라돈을 갚고 나면 돈이 없어요. 조금 남은 돈으로 연탄을 사다 때야 되는데 그때 돈이 많이 없으니 연탄을 새끼에 끼워서 두장 석장을 손에 들고 사다 땠죠. 그 어려움을 누가 알겠습니까. 요즘 젊은사람들 모를 거예요. 살아온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돕니다.”

부인 이순이 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둔 최동식 시는 둘째 아들 병용에게 악기 제작의 맥을 잇게 할 생각이다. 그리고 두 딸이 다 국악을 전공해서 큰딸 선희는 가야금을, 둘째딸 숙희는 아쟁을 전공했으니 그의 악기장 인생은 이렇게 알찬 결실을 맺고 있는 셈이다. 명금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정성스럽게 울림통을 다듬고 있다. ​ 

 


 

이렇게 작업한다.

최동식 명인은 양질의 오동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무주, 진안, 장수, 임실 운암 등에 계속 연고를 두고 있으며, 옛 법대로 오동나무를 3년 이상 건조시킨다고 한다. 거문고의 제작은 가재수공업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거문고 제작의 예술성 및 완성도가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하겠다.

거문고는 민간에서 연주자 또는 애호가의 주문에 의하여 제작되었고, 제작법도 구전으로 전승되었으며, 다른 악기에 비하여 선비들의 까다로운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였기 때문에 제작기술의 수준도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문고를 제작하는데 있어 보통 윗판은 오동나무, 밑판은 밤나무를 사용해 공명통(울림통)을 만들어 그 위에 명주실을 일일이 꼬아 만든 여섯 줄을 세로로 걸치고, 각 줄마다 단단한 박달나무, 대추나무 등으로 만든 열여섯 ‘궤’를 수평으로 세우고 나면 대충 큰 작업은 마무리 된 셈이다. 가야금과 마찬가지로 거문고 역시 소리의 생명은 울림통에 있다. 좋은 목재는 기본이고, 울림통을 정교하게 잘 다듬어 내야 악기다운 악기를 얻을 수 있다. 현악기 가운데 거문고는 제작하기가 가장 까다롭고 시간을 많이 요하는 악기로 꼽힌다. 예를 들어 가야금의 경우 한 달에 10대를 만들어 낸다면 거문고는 같은 기간 동안 2-3대가 고작이다.

흔히 이르기를 악기장(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같은 기능을 가진 사람)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장식기능(솜씨)뿐만 아니라 ‘음악과 음에 대한 깊은 안목과 이해’라고 한다. 악기란 보기에도 아름다워야 하려니와 그 소리 또한 아름다워야 하니, 필시 그것을 만드는 장인도 음과 음악에 대한 남다른 혜안이 곁들여져 있어야 함은 당연지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 명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자신은 솔직히 ‘음’과 ‘소리’에 그리 밝지 못하다고 한다. 소시적 스승으로부터 호되게 견습한 기술과 기능을 배우고 또 익히기를 거듭하다 보니 자연 물리(物理)가 통하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는 자신이 만든 악기의 소리(음)을 듣지 않고도 온전한 완성품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 아름다운 소리란 어떤 것을 이름하는 것일까. 중국 고대의 절세 가인이었던 우(禹)씨 미인을 두고 일컬었던 고사가 하나 있다. ‘낙이불류(樂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라’ 즉 ‘즐거웁되 지나치게 흘러 넘치지 아니하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은 아름다운 소리’라.

명품이 명품으로 인정받기 위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악기들이 이 바닥 내노라 하는 연주자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바로 그 ‘한결같은 소리’에 있다고 한다.

본래 우리 나라 전통 악기를 제작하는데 소용되는 필수적인 재료로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바가지), 토(土), 혁(革), 목(木) 등 여덟 가지를 들고 있다. 이를 팔음(八音: 여덟가지의 다른 재료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덟 종류의 악기에서 나는 음)이라고 부른다.

공장인(工匠人)들이 작업과정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작품에 쓰여질 ‘재료’라 할 수 있다. 명품은 역시 좋은 재목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해서 공장인들은 자연에서 생성되는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치는 법이 없고, 전국 각처, 사시사철, 쓰임새가 될만한 재료를 추려내기 위해 천길 만길 발품 파는 공력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최동식 명인 또한 자신의 집안과 작업장 구석구석에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료를 쌓아놓고도(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양이 차지 않아 항상 쓸만한 재목을 얻기에 목말라 있다. 그의 집안에는 적게는 50년에서 많게는 100년 이상 된 오동나무, 밤나무, 박달나무, 돌배나무, 대추나무 등과 같은 묵은 목재들로 가득하다.

온 집안을 뒹구는 나무판의 용도는 울림통을 만들 재료였다. 눈비 다맞고 4-5년은 지나야 제법 쓸 만하다고 한다. 거문고에 쓰이는 나무는 가구에 쓰이는 것과는 달리 자연상태 그대로 말린다고 한다. 나무속 진이 다 빠지고서야 비로소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오랜 세월 풍파에 뒤틀린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그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는 우선 오래되고 재질이 단단해야 합니다. 여기에다 모진 비바람 눈보라 다 맞고 모질게 자라서 삭아지고 뒤틀린 나무라야 맑고 투명한 제소리를 냅니다. 오래된 고사목이나 마을 당산나무 같은 것들을 예사로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의 집 기와지붕 위나 옥상 같은 곳엔 악기재료에 쓰일 목재들이 벌써 몇 년째 강렬한 태양을 쬐고 눈비를 맞으며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세월 속에 오랫동안 단련되고 진이 빠진 후에라야 비로소 심금을 울리는 소리다운 소리를 얻게 된다. 섣불리 검증되지 않은 신품종이나 싸구려 중국산 등을 잘못 썼다가는 소리를 버리기가 십상이기 때문에 이런 재질은 절대 금물이다.

역시 나무재료 하면 ‘석상자고동(石上自枯桐)을 으뜸으로 친다는 이 세계의 속설이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려 선 채로 제 혼자 말라죽어 진이 다 빠져나간 오동나무, 일생에 단 한번 만들까 말까 하는 명금(名琴)을 얻으려면 이 석상자고동 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그의 거문고 만들기는 좋은 나무를 손에 넣으면서부터 시작된다. 나무를 켜 건조기를 거친 다음 먼저 울림통을 대패질한다.

이어 뒷판을 붙이기까지 그 과정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건조과정에서 뒤틀린 나무판을 곧게 다듬는다는게 보통의 손놀림으로는 어림도 없다. 

거기에 머리와 꼬리부분을 붙이고 나면 괘를 올리는 작업이다. 어느 한군데 정성이 가지 않는 부분이 없겠지만 괘 만큼은 신경이 곤두선다. 괘는 거문고의 소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높이를 달리한 16개의 괘를 모두 올리고나면 현을 다는 작업이 남는다. 명주실을 직접 꼬아 만든 여섯줄의 현을 달고서야 비로소 온전한 악기로 탄생한다. 하나의 거문고가 완성되기까지는 5-6일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최 명인은 이런 과정을 수십 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남은 생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노욕(老慾)이다.​ 

 

<거문고 제작과정>

잘 건조된 오동나무로 몸체를 다듬는다. - 인두질을 한다.- 붙이기- 괘와 안족 만들기- 현 만들기- 줄매기- 악기 완성​ 

 

 

거문고의 과거와 미래

악기장(樂器匠)이란 장구, 북, 단소, 가야금, 거문고 등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전라 풍물굿의 발상지인 전북지역은 수준 높은 풍물악기의 제작 및 보급이 이루어졌던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거문고는 일명 현금(玄琴)이라고도 하며, 고구려 왕산악이 중국 악기를 개량하여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제작법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악학궤범>으로 거문고의 앞판을 오동나무, 뒷판은 밤나무, 괘는 회양목을 사용하여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악기 가운데 하나로, 가야금이 그 곡조가 애절하고 처연하게 흐르면서 심금을 울리는, 다분히 여성적인 색깔을 지니고 있다면, 거문고는 반대로 음색이 깊고 장중하며 남성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거문고는 예로부터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하여 학문과 덕을 쌓는 선비들의 높은 기상을 나타내는 악기로 널리 숭상되어 왔다.

무형문화재가 되자 그동안 사회에서나 가정에서의 따가운 눈총도 말끔히 벗어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악기를 만드는 일을 천한 일이라 여겼어. 왕이나 왕의 중요한 사람이 있을 때 연회에서 흥을 돋구기 위한 일이라 생각한 게지. 근래까지 해도 그런 소리를 들었어. 전통악기라는 걸 만들어봤자 돈벌이도 안 되서 쓸모없는 것이라나? 그땐 그런 소리를 들으면 화가났지’라며 말을 흐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많이 바뀌었지. 하나의 예술작업으로 인정받았고 말이야. 그것도 하나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됐던 추억이라고 말이지’ 하지만 사회는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어린 시선이 부족하다. 전통을 계승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잇기엔 매우 열악한 환경이다. 

‘그나마 우리 전통악기는 수요가 적당해서 걱정이 덜되지만 다른 전통공예품 중 수요가 낮은 것이 많아. 그래서 언제 소리 없이 끊기는 게 많아’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계승하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면 정부는 그 정신을 지켜줘야 해.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그게 부족하거든’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많은 젊은이들의 관심’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요즘 들어 국악을 알리는데 소홀히 하고 있다. 전에는 학교 수업시간에 국악 배우기 등이 수업시간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특별활동시간 때에만 가르치는데 이 마저도 안 가르치는 학교가 더욱 많아진 것이 현실이다.

예전부터 많은 사람과 즐기는 것이 대중화된 춤과 노래는 우리 삶의 일상생활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음악 역시 악학궤범 등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가? 서양의 재즈, 록에 빠져 우리의 음을 잊고 있진 않은가?

‘우리의 소리를 느끼려면 먼저 우리의 소리를 자주 들어봐야 하는데 전혀 들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잖아. 관심이 필요한데 말이야’라며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그는 현대에 맞춰 악기를 개량하기도 했다.

실제로 24현의 가야금이라던지, 12현의 거문고 등을 개량했다. 전통을 고수한다는 쪽에서 보면 개량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의지를 바꾼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서양 악기의 특징이 다양한 음을 쉽게 내는 점이잖아. 우리 악기도 조금만 손질하면 멋지게 변할 수 있어. 예전 것만 고수한다면 그건 박물관의 전시용 물품이지. 실용적이지가 못하잖아.’

거문고는 그의 전부이다. 악기 제작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은 전통국악기 제작 40년이 넘는 장인정신이 살아 숨쉬는 거문고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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